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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 다다른 차충량은 먼저 가진 재물을 털어 남별궁 주위를 지키는 병졸과 이를 총괄하는 하급관리들을 매수했다. 그 사이 장판수는 매복하기에 좋은 곳을 골라 이곳저곳을 살펴 보았다. 차충량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장판수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저 고집불통의 말을 듣는 척 하다가 때가 되면 급소를 때려 기절을 시킨 후 끌고 와야갔어.'

그러나 매복할 자리를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남별궁 인근은 시야가 탁 트여 있었고 큰 나무나 우거진 숲이 없어 활을 지닌 채 몸을 숨길만한 곳은 없었다. 이런 사정을 알리기 위해 장판수는 차충량을 데리고 가 주위를 보여주었다.

"이래서는 몸을 숨긴 채 활을 쏠 수 없습네다. 다른 방도를 찾던가 아니면..."

장판수는 말을 흐렸으나 차충량은 이미 뒷말을 알고 있었다.

"깨끗이 포기하고 돌아가자는 말을 하고 싶소이까? 허나 난 그러지 않을 것이오. 뭔가 방도가 있을게요."

청의 사신이 도달하기로 된 날짜는 아직 이틀이 남아 있었다. 차충량과 장판수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마치 한량인양 행세하며 기생집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차충량은 방안에 틀어박혀 눈을 감은 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더니 어디론가 훌쩍 나가 버렸다. 그동안 장판수는 전란 후 아직도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한양의 저자거리를 걸으며 피곤한 심신을 달래었다. 장판수는 갑사취재에 입격하고서도 자리가 없어 윤계남과 함께 남의 잡일을 도와주며 생계를 이어갔던 옛일이 생각났다. 항상 사람들로 들끓었던 큰길로 들어선 장판수는 예전에는 큰 상인에 밀려 보이지도 않았던 좌판이 드문드문 벌어져 있고, 오가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은 풍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기 국밥하나 말아주시오."

장판수는 그러한 와중에서도 제법 사람으로 붐비는 국밥집 평상에 앉아 주인이 직접 내온 푸짐한 국밥을 단숨에 비워대었다. 그런 장판수의 옆에서 대낮부터 다 떨어진 갓과 도포를 쓰고 입고서는 술에 취해 격론을 토하는 선비들이 있었다.

"그 죽일 놈들이 아직도 궁궐 안에서 국정을 농단하고 있으니 이 아니 통탄할 일이 아니냔 말이야! 김류, 윤방, 김자점 같은 놈들은 목을 쳐도 모자랄 것인데 벌을 주지 아니하고 잠시 귀양을 보내는 거나 체직으로 무마하려 하니 말이야!"

"이게 임금이 잘 못하고 있기 때문이야! 양사(사헌부, 사간원)에서 그들을 벌하자 주청했건만 도무지 들어먹지를 않으니 말일세!"

"하긴 임금 만들어 준 놈들이 누구인데 함부로 하겠나? 클클클."

예전 같으면 누구라도 바로 관아에 고변해 경을 칠 일이었겠지만 주막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쓴 웃음을 짓거나 맞장구를 쳤다. 누군가 뒤집어도 뒤집힐 세상이었지만 청과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삶에서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거 이번에 또 청나라 놈들이 온다고 하지 않나! 백성은 초근목피로 연명해도 그놈들은 잘 먹이고 재물까지 얹어주며 굽신굽신 거리며 기어 다닐 거 아닌가? 거, 공자, 주자 말씀은 목숨 걸고 지키는 자들이 말이야. 끌끌."

장판수는 씁쓸한 기분을 안고 차충량이 머물고 있는 기생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막 방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장판수의 귓가에 차충량이 누군가와 얘기하는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그러니까 뒤탈은 걱정할 거 없네. 자네와 어물패들은 그저 나를 도와 방해하는 놈들은 치고 먼 곳으로 가버리면 되네. 여기 은전을 조금 줄 터이니 사람들과 함께 탁배기라도 나눠 마시며 쉬게나. 그날 반드시 준비를 단단히 해서 남별궁 인근에 와야 하네."

"염려 놓으시오. 이런 은전에 혹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명분이 있는 거사가 아니오? 나 또한 신중을 기할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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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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