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필은 소희의 몸을 조종한다. 군인남편에게 ‘욕’ 먹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필은 그녀로 하여금 라틴댄스 수강증에 이름을 올리게 한다. 더군다나 매주 한 번씩 라틴댄스를 배우게 만든다. 뿐인가. 춤추는 날이 아닌 일주일의 나머지 육일은 춤을 배우기 위한 날들로 전락한다. 심지어 소희의 몸은 라틴댄스의 모든 것에 맞춰진다.
몸이 이러니 마음 또한 변해간다. 아니, 어쩌면 변한다는 말보다 본능을 찾아간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소희는 어려서부터 할머니 손에서 키워졌다. 그때부터 소희는 ‘기구한 팔자’를 인위적으로 부여받는다. 여러 남자와 몸을 섞었던 할머니는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남은 시간을 두려워하는 노인이다. 그런 노인 밑에서 키워진 소희는 당연하게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아버지는 그나마 낫지만 어머니가 특히 심하다.
그 어머니는 소희가 할머니의 핏줄을 이어 받았다며 자식을 ‘불순한’ 물건 취급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소희가 가출하자 당연히 임신했을 거라며 호들갑을 떨고, 소희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딸에 대해 떠벌리며 떠나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소희를 영원히 자신의 지배 아래 두고 싶어 한다. 그러니 소희는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보내고,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한 채 어머니가 정한 팔자대로 살아야 했다. 어머니가 정한 남편군인과 결혼하고 난 뒤에도 시시콜콜 어머니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라틴댄스는 그런 소희의 가슴 속 깊은 곳을 움찔하게 만든다. 라틴댄스를 배우는 순간의 소희는, 더 이상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던 자신이 아니다. 또한 친정엄마에게 온갖 구박을 받을 때 침묵하던 소희도 아니다. 그러한 모습들은 비루한 과거와 함께 사라진다. 소희가 달라진 것이다.
더군다나 소희는 ‘야망’까지 품는다. 언젠가는 어머니 대신 자신과 가족을 휘어잡을 수 있는 ‘여왕벌’이 되려 한다. 하지만 할머니처럼, 혹은 어머니처럼 어설프게 그 속뜻을 드러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희는 라틴댄스의 스텝을 알기 때문이다. ‘뒤꿈치로 음흉스럽게,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발바닥에 볼이 닿을 때마다 은밀하게’ 해야 하는 라틴댄스의 스텝을 알기에 함부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반란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러해야 하니까.
이명랑의 <슈거푸시>는 지리멸렬한 삶을 박차고, 주어진 생을 뛰어넘어 새로운 생을 만드는 주인공의 필 꽂힌 춤바람을 다루고 있다. 춤바람, 그 단어는 참으로 부정적이다. 한때 망국병의 하나로까지 뽑혔을 정도라고 하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춤바람에 몸을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소희처럼 춤이 아니면 비루하고도 지리멸렬한 삶을 박찰 용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춤을 추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 춤을 함께 추는 사람들과의 교류, 춤추는 순간의 감정 등이 더하고 더해 만들어진 춤바람만의 황홀함을 모른다면 소희는 영원히 어머니에게 있는 족족 빼앗기는, 그렇고 그런 존재로 삶을 마감했으리라. 소희의 어머니처럼 춤 한 번 춰보지 않고 춤바람을 욕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모른다. 이곳을 넘어 저곳으로 날아가게 하는 춤바람의 위력을.
라틴댄스의 마지막 수업 시간, 소희는 비상을 다짐한다. 춤바람을 타고 높은 곳으로 훨훨 날아올라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보려는 것인데 그 다짐은 마치 기나긴 시간 웅크리고 있다가 한순간에 날아오르는 나비의 모습과 같다. 날아오르는 방식이, ‘뒤꿈치로 음흉스럽게,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발바닥에 볼이 닿을 때마다 은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미적지근하게 여겨질 수 있겠지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한가. 날아오르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라틴댄스의 경쾌한 리듬과 그 리듬에 몸을 실은 여자의 인생 독법이 어울리는 <슈거 푸시>. 작가의 이름처럼 ‘명랑’함이 가득하다. 음흉스럽고, 조심스럽고, 은밀한 명랑함이.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