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알아요>의 서태지가 조금씩 조금씩 어려운 음악을 하다가 나중엔 보통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즐기기 힘든 음악을 들고 나왔을 때 나는 참 아쉬웠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에 있어서도 기존의 진부함을 파격적으로 깨뜨렸기 때문에 내겐 거의-내 또래 많은 이들이 그랬듯-우상과도 같이 자리 잡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가 사회에 하나의 커다란 코드로 자리잡고 그가 자신만의 음악세계로 침잠해 들어가자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록이나 메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일반 대중인 나로서는 그의 최신작들을 더 이상 손쉽게 즐길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거칠수록 조금씩 조금씩 깊어져가는 작가, 이명랑의 신작 <슈거푸시>를 읽었을 때도 약간 비슷한 느낌이 왔다. 이 작가, 이보다 더 깊어진다면 어쩌면 다음 작품은 내 감상 수준 이상으로 가버릴 지도 모르겠다.
<삼오식당>이 약간의 색채가 있는 깔끔한 수묵 채색화 같은 작품이었다면 <나의 이복형제들>은 색깔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맑은 먹선을 가진 수묵화였다. 그 먹선이 <슈거푸시>에서 갑자기 굵고 진해졌다. 이 정도면 신고식은 충분히 한 셈이니 이제 내 본색깔을 보여주겠다는 듯, 거침없이 휘둘러대는 작가의 굵은 붓끝. 독자들의 가슴엔 굵은 먹선이 대담하게 번져간다.
소재면에서도 조금 틀리다. <삼오식당>에서는 서민들의 일상풍경을, <나의 이복형제들>에서는 사회 다양한 계층에서 소외된 약자들의 풍경을 그렸다면 이번에 작가가 조명을 비춘 것은 '가족'이라는 견고한 테두리 내의 약자이다. 약자 중의 약자를 비추고 있다는 것은 여전하다. 그렇다고 '가부장적 질서에서 희생당하는 여성'을 그렸다고 보기도 힘들 것 같다.
주인공인 소희의 정신을 깊게 병들게 하는 건 주인공을 낳은 친엄마이다. 가부장적 가족 질서를 비판한 기존 소설들에서 폭력을 가하는 사람은 주로 아빠나 남자 형제였다. 어머니나 시어머니, 언니 등 여성들은 주인공에게 상처를 입힐지라도 결국 가부장제하의 같은 희생자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안는다는 결말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조금 다른 곳으로 시선을 주고 있다.
일종의 모녀 사이 권력 다툼 같은 것인데, 굉장히 생소했다. 이 소설 상의 엄마는 딸을 노골적으로 괴롭히고 커다란 정신적 상해를 입힌다. 소희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에 의해 늘 자신의 몸과 생각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왔고, 그에 관한 변명과 방어로 일생을 일관해왔다. 결혼도 엄마의 비난에 대한 방어기제로 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러한 관계설정이 내게는 무척 생소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혹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갈등을 그린 소설은 흔해도 엄마와 딸 간의 갈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이명랑이 그리고자 한 것은 가부장제 내에서, 즉 약자라는 테두리 내에서라도 강자로 군림하고자 했던 어머니상이었을까? 그렇다면 이 소설 또한 '가부장제'와 관련된 소설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까? 작품 뒤에 덧붙인 장석주의 해설에 의하자면 이 소설은 그렇다. 단연 '가부장제에 의해 비틀린 가족관계'에 관한 소설이다.
작가가 조명한 건 단순했다. 가부장제라는 기존 질서는 하나의 설정배경일 뿐, 작가가 환하게 밝혀 드러내고자 했던 건 강한 어머니가 무심코 딸에게 던졌던 돌들이 어떻게 딸을 병들어가게 했나, 그리고 딸은 그에 어떻게 반응하고 살아남게 되는가였다. 이명랑 소설들이 항상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관계의 세세한 면, 그것에 집중적인 조명을 비추는 것이다. 사회를 이루는 큰 틀이나 제도적 장치는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끝날 뿐, 작가가 아프게 가지고 가는 것은 언제나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능적인 비열함, 탐욕, 위선이다.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아픔이다. 약자로서 이미 충분히 아픈 화자는 어디를 가건 다른 약자들의 아픈 세계를 순식간에 들여다본다.
...여직원의 음성은 기계음이었다. 그녀는 로봇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 여자는 저렇게 서서 저 똑같은 말을 온종일 몇 번이나 반복해야 되는 걸까,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측은했다. 할 수만 있다면 로봇을 닮은 저 여직원에게도 수강증을 하나 끊어주고 싶었다. 지금 내 점퍼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과 똑같은 걸로 하나...
수강증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당한 불친절에 반응하는 주인공의 반응은 이렇게 섬세하다.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해볼 수 없는 반응이다. 자신이 아팠던 사람은 타인의 아픔도 저렇듯 섬세하게 감지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세상의 모든 약자들에게 편향성을 가지고 아프게 문장을 만들어냈을 작가의 시선을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이명랑의 소설에는 해법이 없다. 그리고 더 나아지리라는 단서도 거의 없다. 소외된 지대에서 약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의 약함을 조금씩 조금씩 처절하게 인식해 나가 그 끝점에 서면, 실현될 가능성이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 몽상과도 같은 꿈을 꾸고 그 순간 소설이 끝난다. 그렇다면 독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독자는 함께 배를 타고 갈 뿐이다. 소설의 주인공들과 함께 출렁이며 함께 끝없이 아파하는 것. 깊게깊게 가라앉는 것. 문학작품이 꼭 해법이나 대안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어떤 작품은 그저 조명을 환히 비춰주는 것만으로 그 존재의의를 다할 수가 있는 법이다.
일상에 지루하게 묻혀있던 주부가 어느 날 '춤'과 만나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하고 춤추는 재미에 푹 빠져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광고문구나 책의 앞뒤에 있는 인용구들을 보았을 때도 나는 작가가 이명랑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이야기가 아닐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춤' 자체에 열광하거나 재능을 발견하고 나는 듯이 춤을 춘다는 대목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라틴댄스'로 대변되는 여인들의 일탈에의 욕망, 조금 더 아름다운 세계를 향한 발돋움, 그 '라틴댄스'라는 세계에서조차 강자로 새롭게 등장하는 댄스 선생님에 대한 읍소 등 오히려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할 뿐이다. 이 소설에서 '라틴댄스'란 그저 주인공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하나의 ‘기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기제로 인해, 주인공은 더더욱 소외감을 느낀다. 날씬하고 유연하고 아름다운 댄스강사로 인해, 엄마 못지 않게 아름다운 실루엣을 형성하는 강사의 딸로 인해, 그리고 어떻게든 '나비'가 되려고 버둥거리는 '배추흰나비'들의 몸부림으로 인해. 자신은 '배추흰나비'의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며 주인공은 그저 이렇게 꿈꿀 뿐이다.
...너희들이 내게 '로열젤리'를 주지 않으면 나는 훔쳐서라도 먹겠어. 그리고 나서 나의 몸집이 너희들의 몇 배로 커지게 되면 그땐 말야, 내가 갇혀 있는 이육각형의 방을 파괴하고 거대한 나만의 콜로니를 형성할 거라고. 너희들이 쯧쯧, 혀를 차고 있는 동안에 어느새 나는 여왕벌이 되어 있을 거야. 그때까지 나는, 나의 이 육각형의 방 속에서 숨죽이고 있겠어. 그래, 그렇게 너무 오래 숨죽이고 있다보면 가끔은 이러다 질식사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지기도 할 거야.
그럴 땐 더듬이라도 비벼대며 버텨보는 거야.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추억하면서 말이지. 누구나 그런 추억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아가잖아.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가을 저녁을. 그 저녁의 나는 이제 어느 곳에도 없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 내가 나의 더듬이를 비벼대는 동안만 내게로 되돌아오는 자유나 위안 같은 것, 그래 그것들은 우스울 만큼 현실감이 없지. 그 정돈 나도 알고 있어.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그것들이 나의 현실이야...
그리고 이러한 끝장면으로서 이 소설은 충분히 그 존재 의의를 달성한다. 독자는 하강한 그 지점에서 당분간 헤어나오지 못할 것, 이로써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조금 더 진하게 물들였다. 다음 작품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기대가 되기도 하고 한편으론 겁이 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