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7

평안도 평양. 황 참봉이 사랑채 마루를 오가며 연방 좌불안석이었다.

'이 일을, 이 일을 어찌한다?'

으리으리한 저택을 가진 배 나온 주인이 잔뜩 굳은 낯으로 소슬한 저녁 모퉁이를 서성이는 모습이 묘했다.

'기어이 이놈들이 냄새를 맡았다. 백호대에게 말을 내준 것을 어찌 알았을까?'

보름 전 권영수가 감영을 방문하고 평양을 벗어날 때 말 두 필을 백호대에게 내주었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평양 내에 짐 싣는 태마가 아닌 기마를 기르는 마굿간이래야 대동강 객주와 병영, 그리고 자신과 한 두 집의 사대부가 뿐일 터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감영에서 나온 나졸들에겐 도난 당한 것이라 둘러대었지만 윤비장이라는 자가 직접 탐문하고 간 뒤론 자신을 의심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걸 감지한 터였다.

'오늘 밤이라도 식솔을 이끌고 운산으로 뜬다? 아니면 한 번 모르쇠로 배를 튀겨 본다?'

이런 생각을 하던 황 참봉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될 말이다. 어떻게 일군 가산인데 이 기반을 다 버리고 뜬단 말이냐. 아무 것도 모르는 식솔들에겐 또 무어라 이른단 말이냐.'

한숨을 몰아쉰 황 참봉은 고개를 들어 처마 사이로 뜨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내가 혹여 저 달을 해로 착각한 것은 아니었던가. 현실이 너무 어둡다 보니 저 빛으로도 세상을 밝힐 수 있다 믿었던 것은 아닐까? 대동계의 힘으로 이 썩은 세상을, 이 부조리한 세상을 뒤집을 수 있었다 믿은 건 성급한 결정이었나?'

황 참봉이 달에서 눈을 돌렸다. 고개를 숙였다. 현기증이 일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던가. 그런 세상이 올 것인가? 돈으로 참봉을 사지 않고도 내 재능과 내 재물로 떵떵거리며 살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적어도 대동계 안에서만은 그럴 수 있지 않았는가. 어쩌면 그 이상이 현실로 될지 모른다. 이 진사 댁과도 김 참판 댁의 둘째 자제와도 신분의 벽을 넘어 교분을 쌓은 것이 다 한 꿈을 꾸고 있기 때문 아니었겠는가. 더구나 대동계에서도 조만간 몸을 움직이려 하니 조금만 참아보면......'

황 참봉이 다시 고개를 들어 달을 응시했다. 요란스럽지 않게 은은한 빛으로 하늘을 가득 덮은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엷은 먹구름이 살포시 달을 훑고 지나갔다.

'결국 달은 달인 게야. 다시 아침이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차라리.....'

황참봉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비장하게 입술을 물었다.

"감쇠야."

사랑채 중문 너머로 하인을 불렀다. '게 누구 없느냐'가 아니라 특정인을 지칭한 부름이었다.

"예, 나리 마님 부르셨습니까요?"

나이 스물이 갓 넘은 듯한 떠꺼머리가 금세 뛰어 들어왔다.

"내일 날이 밝기 무섭게 감영으로 달려가 윤 비장을 좀 보잔다 일러라. 아냐, 아냐. 감사께 뵈올 수 있을런지 여쭈어라. 내가 중대한 일로 긴히 아뢸 말씀이 있다 꼭 여쭙고."
"감.... 감사를 뵐 만큼 긴한 일인갑쇼?"

감쇠가 주인의 굳은 얼굴이 의아해 물었다.

"너는 알 것이 없느니라. 어쩌면 우리 집안의 흥망이 달린 일이니 날이 새는 즉시 답을 받아 와야 하느니."
"예."

돌아서는 감쇠의 눈이 반짝했다. 황참봉은 중문을 나가는 감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사랑에 앉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식구들은 물론이요, 집안 대소사를 꼼꼼히 챙기는 종복에게조차 입을 열 수 없는 심회가 갑갑했다. 알 수 없는 앞일에 대한 불안과 모든 일을 자기가 결단해야 한다는 고독감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자정에 이르도록 황 참봉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의관도 벗지 않고 책 없는 서안에서 일렁이는 촛불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 때 밤 수상한 그림자 둘이 사랑채 담을 넘어들었다. 검은 복색에 흡사 고양이가 걷는 듯한 날래고 조용한 걸음. 예사롭지 않았다.

"불이야!"

싯노란 불이 사랑채를 감안 안고 화글거리는 가운데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높아졌다. 식구들과 하인들이 물을 담아들고 달려왔으나 바삭 마른 목조가옥이 타들어가는 불길에는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옆으로 번지지 못하게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입술을 날름거리며 이글거리는 화마가 늦은 밤하늘을 밝혔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이 기자의 최신기사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횡단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