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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왜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 앨범에 실려 있는 '교실이데아'의 노랫말이다.

'1990년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불리는 시대의 '문제아'들은 권위주의와 경쟁으로 표상되는 한국 제도교육의 현실을 통렬하게 비웃었다. 이른바 '주류사회'에 익숙한 기성세대는 그들의 절규를 지나가는 소음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강력한 복음이 되고 있다.

▲ 이태준군
ⓒ 인권위 김윤섭
이태준군은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다. 서울에서도 소위 '명문고'로 알려진 S고에 다닌다. 고2 때 예체능계로 진로를 바꿔 학과공부에 대한 부담이 다소 줄어들긴 했다지만, 밤잠을 줄여가며 입시공부에 매달려도 시간이 모자라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와중에 이군은 뜻하지 않게 전국 중고생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끄는 뉴스 속의 인물이 돼 버렸다. 그는 바로 2005년 3월 "강제 두발단속은 인권 침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3명의 학생 중 한 명이다.

이군은 S고에 입학하기 전 J중학교를 다녔다. 두발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던 J중학교에서 이군은 학생회장을 지냈다. 이 무렵 그는 학교에 매점을 만들고 여자화장실에 생리대 자판기를 설치하는 등 학생들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학군 배정에 따라 S고에 입학하면서 이군의 머리카락은 성할 날이 없었다. 입학한 지 두 달쯤 됐을까? 어느 선생님은 예고도 없이 수업 도중 7~8명을 호명한 뒤 가위로 머리를 잘랐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앞머리 4cm, 뒷머리 스포츠'라는 애매모호한 교칙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학교에서 선생님이 직접 머리카락을 자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그였다. 이날 이군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가위질을 마치고 난 선생님의 훈시였다.

"우리 S인들은 머리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그게 우리의 자랑이다. 명문고 학생답게 품행을 단정하게 하라!"

이날의 충격은 오래 갔다. 거울 속에서 두피가 흉측하게 드러난 모습은 부끄러움을 넘어 슬픔을 느끼게 만들었다. 행여 남들이 볼까 교문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가면서 수도 없이 되짚어 보았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이건 부당한 일이다."

그때부터 이군의 가슴 속에는 무의식적인 반발심이 꿈틀거렸다. 그런 이유로 그는 머리가 길게 자라도 이발소를 찾지 않았고, 그의 머리카락은 이후에도 여섯 번이나 더 선생님의 가위에 잘려 나갔다.

"다른 사람한테 내 교복을 입혀서 두발검사를 받게 하고, 조회시간마다 화장실에 숨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선생님은 '머리 자르기 싫으면 S고를 떠나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저는 '교칙을 바꿔야지, 내가 왜 떠나야 하나'하는 의문을 품었어요."

ⓒ 인권위 김윤섭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고3 교실은 감옥이나 다름없다. 이군도 고3이 되면서 공부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3학년 1학기가 되자 S고 선생님들은 "고3이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아선 안 된다"며 두발단속에 나섰고, 겨울 동안 길렀던 이군의 머리카락은 또 다시 잘렸다. 왼쪽 구레나룻에서 뒤통수를 돌아 오른쪽 구레나룻까지 반 바퀴를 돌아 나가는 반원이 생긴 것이다. 이군이 "더는 참을 수 없다"며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도 그 직후였다.

이군의 진정이 접수되고 국가인권위의 조사가 시작되자, S고에서는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교실에서 가위가 사라진 대신, 수차례 이발을 종용하고 경고조치를 어길 경우 체벌을 가하는 선생님들이 나타났다.

한편 이군은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한 이후 S고 홈페이지를 통해 익명으로 두발단속의 부당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그러자 학교 측이 IP추적에 나섰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이군은 용의자로 지목받기에 이르렀다. 이군은 이때 선생님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은 것을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다. 그가 지금 실명을 밝히고 인터뷰에 응하는 것도 솔직하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다.

"1학년 때 어떤 선생님이 그랬어요. S고에서 두발자율화가 되는 날은 S고가 문을 닫는 날이라고요. 여기까지 오면서 제가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제가 나섰기 때문에 S고가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잖아요. 서태지도 그렇게 노래했어요.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2005년 6월 국가인권위는 이군을 포함한 세 명의 학생이 진정한 두발단속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검토를 마치고, 교육인적자원부장관 및 각 시·도 교육감 그리고 S고를 포함한 3개 학교장에게 "학생의 의사에 반한 강제이발은 인권 침해이므로 재발방지를 위한 적극적 조치를 강구할 것" 등을 권고했다.

국가인권위 결정 이후 S고에서는 학생회가 학교측에 새로운 두발규정을 제시하는 등 변화의 기류가 감지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군의 기대치와는 거리가 멀다. 이군은 "국가인권위가 두발제한이 기본권 침해라는 점을 분명히 했으니 앞으로는 학생들이 직접 학교생활규정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군은 오래 전부터 서태지의 열성팬이다. 그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뒤늦게 피아노 전공을 선택한 것도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다. 그는 "예술가에게 표현의 자유는 생명과도 같다"며 슬그머니 두 장의 증명사진을 꺼내놓았다. 분명 똑같은 사람이지만 판이한 헤어스타일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일곱 번이나 잘려 나간 스포츠형이고, 다른 하나는 제법 성숙해 보이는 장발이었다.

"머리를 길러야 분위기가 제대로 잡힌다"는 이군의 말은 사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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