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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9일, 잠에서 깨어나 버릇처럼 이동통신 단말기를 열어보니 새벽 5시 55분이다.
'배호 어머님 기일이 오늘이라고 했지?' 이른 아침 산책도 할 겸 왼쪽 다리에 보조기를 차고 20평형 다세대주택의 문을 열고 나섰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이 어머니 기일이라고 날을 맑게 해주시려는가?"

많이 내릴 비는 아니지 싶어, 모자로 우산을 대신하여 언덕길을 내려간다. 이것도 이상한 일이다. 배호(裵湖)와 관련된 무슨 일이 있을 때는, 행사 앞에 가랑비가 흩뿌리거나 행사 뒤의 밤에 비가 내리곤 한다. 등산 지팡이 힘을 빌려 내려가는 동안,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경부선 고속도로 비가 내린다" "비 내리는 명동거리 사랑에 취해 울던 밤" "주룩주룩 밤비만 내리는 남산"하는 비가 나오는 배호의 노래가 잇따라 머릿속으로 흘러간다.

차 한 대 들어올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을 나서서 언덕길을 힘겹게 내려간 다음, 밤새워 문을 열어놓는 단골주점에 들어가니 여주인이 남편과 두 남매의 아침상과 도시락을 챙기고 있다.

"이렇게 일찍 어디 가요?"
"배호 묘소 갑니다."

"행사 있어요?"
"배호 어머니 기일이라서 성묘가 있답니다."

그녀가 맛있게 끓여준 라면으로 아침 끼니를 때운 뒤에 535번 마을버스를 타고 동암역까지 간다. 1호선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 구파발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니 하광성씨가 와 있다. 송파구 소재 '배호 라이브 카페'에서 매월 30일에 열리는 배호 모창 대회에 참가하여 2회 때 1등을 한 노래 솜씨를 지니고 있다. 물 끓는 듯한 열창이 돋보이는 가수다.

"오늘 진짜 배호 팬 한 분이 오실 겁니다."

선글라스를 쓴, 체격 좋은 하광성씨가 말한다.

"여성입니까?"
"예. 하정애 여사님입니다."

잠시 후, 누가 보아도 호남이라고 할 만한 황광남씨와 배기모(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 인천지부장 김종구씨가 모습을 보인다.

"아, 하정애 여사님 말씀이군요. 그분의 부군이 20년쯤 전에 함안군수로 재직할 때 직접 캔 산삼 같은 더덕으로 정성스레 술을 담그셨답니다. 더덕주이지요. 오래 묵은 이 귀한 술을 오늘 배호님의 어머님 타계 10주기 추모식의 제주(祭酒)로 가져오시겠답니다."

곧 하정애씨가 더덕주를 들고 와 먼저 와 있는 일행과 만났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아! 하정애 여사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첫 인상이, 겸손하고 꾸밈이 없는 분이다.

"제가 배호씨랑 동갑입니더."
"아, 그러시군요. 배호님이 지금 살아 계시다면 우리나라 대중가요는 지금보다 훨씬 상승해 있을 겁니다. 더덕주는 가져오셨나요?"

앞서 말한 대로 하정애씨는 자신이 담가 온 20년 묵은 더덕주에 대해 설명한다.

"제사 마치고 음복하시면서 그 맛을 느껴 보세요."
"예, 고맙습니다."

잠시 후 배기모 중앙회장인 유형재씨, 배기모 사무총장인 송진복씨가 모습을 보인다. 일행은 시내버스로 가지만, 나는 김종구씨와 함께 배호 어머니의 양아들인 정용호씨의 지프를 기다린다.

▲ 배호 일가의 묘전으로 가는 길에 비가 흩뿌리고 있다
ⓒ 김선영

정용호씨를 만나 그의 지프에 동승한다. 도로를 한동안 달려 장흥공원묘지를 통과하는데도 비는 여전히 내린다. 달콤한 이슬비다.

시내버스로 먼저 출발한 일행들은 배호 묘전에서 제사상을 차리느라 한창이다. 하정애씨는 자신의 손수건으로 <두메산골> 노래비에 새똥이 떨어져 묻어 있는 것을 깨끗이 닦아내고 아예 휴지를 꺼내어 노래비 전체를 닦아준다. 배호 홍보대사 가수 배오씨, 배기모 총무국장 정순덕씨, 배기모 여성국장 김영순씨도 와 있다.

▲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정용호씨가 자신이 양어머니로 모신 배호 모친에게 절하고 있다
ⓒ 김선영

▲ 배호와 동갑인 열성팬 하정애씨가 20년 묵은 더덕주를 배호 모친에게 제주로 올리고 있다
ⓒ 김선영

▲ 배호의 여성팬들이 배호 모친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다
ⓒ 김선영

▲ 김종구씨의 도움을 받아 하광성씨가 배호 모친에게 제주를 올리고 있다
ⓒ 김선영

배호 어머니 김금순 여사의 제사를 마친 뒤에 기념촬영도 하고 서로 담소를 나눈다. 배오씨와 하광성씨는 배호 노래를 열창한다. 배호 관련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주력(注力)으로 써온 나에게 한마디 요청하기에 배호의 <사랑은 하나>를 불렀다. 1절 가사를 다 못 외워서 2절만 불렀다.

"찾아온 육교에는 밤은 깊어가고
우뚝 선 대한극장 저 그림이 나와 같구나.
추억에 젖어 눈물에 젖어
터벅터벅 걷는 발길
사랑은 하나."


그런데 다 부르고 나니 뭔가 이상하다. '추억에 젖어 눈물에 젖어' 앞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한 소절을 빼먹었던 것이다. 그 소절이 없으면 가사는 단팥 빠진 찐빵 신세다. '그날 밤을 못 잊어서 그 사랑 잊지 못해.'

▲ 정용호씨가 일행에게 배호 어머니와 자신과의 추억을 들려주고 있다
ⓒ 김선영

▲ 하정애씨가 배호 공연을 보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일행에게 실감나게 들려주고 있다
ⓒ 김선영

빛깔 좋은 더덕주로 음복을 한다. 더덕주 맛을 보며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한다.

"야, 이거 산삼주가 부럽지 않네요."
"이건 틀림없는 느낌표군요."

제사를 마친 시각이 정오를 넘고 보니 허기가 온다. 이번에는 정용호씨와 배오씨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하산한다. 하정애씨는 입담도 좋다. 추어탕이 나오기 전에 배호님을 직접 보았던 오래 된 추억을 들려준다.

▲ 하정애씨 "배호씨 오른쪽 뺨에 점이 두 개 있었어요"
ⓒ 김선영
"제가 시집 간 뒤에 배호씨 공연을 처음으로 직접 봤심니더. 배호씨가 팬들에게 악수를 해주는데, 저는 너무 감격하고 떨려서 손 잡을 용기도 내지 못했지예. 고개를 숙였어예 그만,"

영락없는 새댁이다. 그러나 세월은 유수(流水), 이제는 입담 좋은 할머니가 되었다.

"그런데 아주 못 쳐다본 건 아니고예, 얼굴에 점이 두 개 있었어요."

그 말에 좌중은 박장대소, "맞습니다"하고 정용호 배호 의제가 확인을 해준다. 덕담이 오가는 대화를 나누며 추어탕으로 든든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가랑비는 그쳐 있었다.

▲ 배호 모창가수 배오씨가 배호 어머니 묘전에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배호 창법으로 부르고 있다
ⓒ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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