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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문
ⓒ 김정은
유럽 부호들의 휴양지 안탈리아

눈부시게 푸르른 지중해 바다, 바다색과 경쟁이라도 하듯 작열하는 태양빛. 그리고 푸른 바다와 어울리는 호화스러운 요트. 이 세 가지는 유럽의 유명한 휴양 도시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그런 면에서 이곳 안탈리아는 유럽의 부호들이 선호하는 휴양 도시 중 한 곳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안탈리아 항구에는 호화스러운 요트들이 정박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페르가몬 왕국 시절부터 아달리아로 불리워지던 이곳은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속주 육성책으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나는 지금 이 지역의 대표적인 로마시대 유적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문 앞에 서 있다.

▲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문에 조성된 마차길
ⓒ 김정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문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안탈리아 방문을 기념하여 시민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이 거대한 대리석 문의 존재감은, 안탈리아를 상징하는 출입문이라는 의미 외에도 아직도 깊고 거대하게 패인 마차 바퀴 자국 만큼 세월의 연륜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로지 황제의 방문 기념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에는 꽤 큰 규모의 문이다. 과연 당시 시민들이 정말 자발적인 의지로 이 문을 세우는데 참여했을까?

평소 같으면 우리 나라 지방에 산재한 일부 선정비의 존재처럼 당연히 반강제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기념할 대상이 바로 로마의 5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 황제기에 조금 망설여지게 된다. 그 이유는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인간존재에 대해 평가하는 대목을 우연히 보고 느꼈던 그의 섬세함 때문이다.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는 인간 존재를 평가하는데 다음 세 가지 수단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첫째 자기 자신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가장 어렵고 가장 위험한 것이지만 또한 가장 성과가 많은 방법이기도 하다. 둘째 타인을 관찰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흔히 우리들에게 그들의 비밀을 감추려고 하거나 혹은 그들이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에게 믿게 만들려고 한다. 셋째 책이 있는데 책이란 그 행간에 태어나는 제 각기 특이한 관점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게 마련이다."


이처럼 섬세한 철학자의 감성을 지닌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과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에서 반강제로 방문기념문을 건립하는 것을 좋아 했을까? 아니면 잠깐의 방문만으로도 좋아, 시민들이 자발적인 기념문을 세웠을 만큼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인기가 좋았던 것일까. 나의 추측은 여기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진행해가다보면 하두리아누스 황제가 말한 관점의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역사는 불친절하게 흔적만 남길 뿐 더 이상 얘기해주지 않는다. 단지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그 흔적을 보고 이야기를 추정하고 분석하는 후세 사람들의 몫일 뿐. 이런 저런 생각으로 구시가지에 들어서면 이 도시의 또다른 역사인 이블리 첨탑(Yivli Minare)이 나온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문이 로마시대의 속주였던 이 지방의 역사를 보여주는 흔적이라면, 이 이블리 첨탑은 셀주크 투르크 지배 하에서의 무슬림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 이블리 첨탑 주변 모습
ⓒ 김정은
13세기 셀주크 트루크의 술탄이었던 알라아틴 케이쿠밧(Alaeddin Keykubat)에 의해 세워진 붉은색 벽돌탑은 38m의 높이를 자랑하여 멀리서 볼 때는 눈에 띄지만 가까이 가보면 무성한 나무에 가리워져 전체를 볼 수가 없다. 다만 탑 정면에 부착되어 있는 푸른 타일의 흔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그 옆의 '케식 미나렛'이다. 원래는 5세기 경에 성모 마리아 교회로 만들어진 것인데 성 소피아사원처럼 오스만 투루크 때 모스크로 바뀌어진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곳을 나와 구 시가지의 좁은 골목을 걸어가다보면 100년, 200년도 넘는 집들이 복원되어 지금은 대부분 호텔, 펜션, 주점, 또는 가게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구 시가지 구경을 마치고 신시가지로 나오니 마침 현재 터키 사람들이 국부로 존경한다는 케말 파샤의 동상이 보인다.

터키인의 국부 케말 파샤

▲ 케말 파샤의 동상
ⓒ 김정은
케말 파샤의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이다. 터키어로 파샤라는 단어가 장군이라는 뜻이라면 아타투르크라는 단어의 뜻은 '아버지(국부)'라는 뜻이다.

그의 일생은 이 두 가지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육군대학을 나와 제1차 발칸전쟁에서부터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자칫 지금의 드넓은 터키땅이 사분오열될 수 있었던 다마트 페리트파샤 내각 결정에 반대하고 시작한 조국해방전쟁을 이끌며 영토를 대부분 지켜내기까지 장군으로서의 그의 삶, 술탄제를 폐지하고 터키공화국의 초대대통령이 되어 칼리프제의 폐지, 민법 개정, 태양력·미터법 채용, 문자 개혁 등 각종 제도 개혁을 단행한 정치가이자 개혁가로서의 추진력있는 그의 삶, 그리고 성씨법의 제정으로 대국민의회로부터 '아타투르크(아버지)'라는 최고의 성을 부여받고 사망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이 이 두 가지 이름에 고스란히 배어있다고나 할까?

케말 파샤 하면 떠오르는 또 한 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박정희이다.

성공한 군인이자 개혁적이고 과감한 카리스마를 가진 대통령의 삶, 그리고 국민으로부터의 열렬한 지지. 군인으로 출발하여 대통령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케말 파샤의 삶은 그에게 충분히 매력적이고 본받을 만하다. 그래서인지 박정희는 케말 파샤의 자서전을 탐독할 정도로 평소 케말 파샤를 존경하고 그의 열정적인 삶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가 꿈꾸던 케말 파샤의 삶과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터키 지역의 대표적인 기반 시설인 공항이나 종합 운동장의 이름을 지을 때 터키인들은 별 고민도 하지 않은 채 거의 모두 케말 파샤가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성 아타투르크를 사용할 정도로 케말 파샤의 존재감은 아직도 터키인의 가슴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그를 닮고 싶어했던 한국의 전직 대통령은 지금 원래 걸려 있던 친필현판도 없앨 만큼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군인으로 대통령으로 살아온 두 사람의 삶이 이처럼 민망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케말 파샤의 삶을 닮고 싶어했으나 그의 실질적인 것은 무시하고 겉모습만 닮으려고 했던 박정희의 관점의 오류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으로서의 삶은 둘 다 유사해보이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케말 파샤의 군인으로서의 삶이 조국의 영토 회복을 위해 싸워온 삶이라면 박정희의 군인으로서의 삶은 일본 제국주의의 수호를 위해 싸워온 부끄러운 삶이다.

개혁적인 대통령의 삶 또한 케말 파샤가 이전의 이슬람적인 구습을 타파하기 위해 사망 직전까지 일관적인 개혁을 펼쳤지만 박정희는 개혁으로 시작하다 독재로 빠져버린 채 일관성을 잃었다는 점에서 너무나 큰 차이가 나 버렸다. 이처럼 관점의 오류에 빠지게 되면 본인은 개혁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독재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기 마련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 속이 착잡했다. 우리 나라는 언제쯤 전 국민이 마음 속으로 망설임 없이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 생길까?

▲ 안탈리아에서 바라본 지중해의 일몰
ⓒ 김정은
어느덧 안탈리아 하늘을 밝게 빛내던 태양도 아름답게 지려고 하고 있다. 안탈리아의 작열하는 태양과 아름다운 일몰처럼 터키인의 가슴 속에 한결같이 남아있는 케말 파샤의 흔적이 몹시 부러웠던 안탈리아의 하루도 어느덧 지중해의 아름다운 일몰과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7박8일 터키여행기 13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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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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