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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대에선 새끼 꼬고, 자대 배치 받은 후엔 전역할때 까지 열심히 작전과 워드병(?)으로 키보드만 두드려 댔다. 아버지 걱정과는 반대로 다른 친구들보다 아주 편안한 군 생활을 한 셈이다.
신교대에선 새끼 꼬고, 자대 배치 받은 후엔 전역할때 까지 열심히 작전과 워드병(?)으로 키보드만 두드려 댔다. 아버지 걱정과는 반대로 다른 친구들보다 아주 편안한 군 생활을 한 셈이다. ⓒ 조경국
군 입대 며칠 만에 아버지의 편지를 받다

"사랑하는 아들아,
할아버지, 할머니는 잘 계시고...
니 동생은 여전히 공부도 안하고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고...
암튼 걱정 말고 군 생활 잘 해라....
사람은 자고로 군대를 갔다 와야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거다.
....."


200자 원고지 10장에 빽빽이 써내려간 그 글은 틀림없는 아버지의 필체였다. 특별하지도 않은 가정사에 대한 나열이 한참 이어지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새삼 새록새록 솟아오를 즈음, 마지막 한 문장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탈영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그렇다. 아버지가 정작 하고 싶던 말씀은 그 마지막 문장이었던 것이다. 입대하기 전, 여자친구에게 기다리기 힘들면 고무신 거꾸로 신어도 된다고 미리 말해두었지만 내심 여자친구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신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6주 신병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 "사랑하는 아들아"로 시작해서 "탈영할 생각은 꿈도 꾸지마라"는 내용으로 끝나는 편지가 매주 한통씩 도착했다.

여자친구도 아닌 아버지가 매주 편지를 보내고, 마지막 내용이 '탈영금지'라는 사실에 같은 내무반 동기들은 부러움 반, 호기심 반의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 애인이나 친구, 누나, 동생에게 편지를 받는 일은 있었어도 아버지에게 그것도 '탈영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받는 훈련병은 내무반에서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편지의 사연을 제대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탈영하지 마라? 너 무슨 사고치고 들어왔냐?"

60년대 말 헌병으로 복무했던 아버지가 군대에서 가장 흔히 접할 수 있었던 건 애인문제로 군대를 벗어났다가 잡혀오는 탈영병들이었던 것이다.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아마도 아버지는 여자친구를 남겨두고 입대한 내가 내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그때 6관구 헌병대 구치소엔 탈영병만 한 300명 있었지."
"그렇게 많이요? 그런데 무슨 일로 탈영했데요?"
"대부분 여자 문제였지. 갑자기 애인한테 편지가 끊기면 얼마나 갑갑해. 어떻게든 나가려고 발버둥치다 탈영하는 거지. 구치소에서 6개월 있다 다시 부대로 돌아가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게 된 아버지가 6관구 헌병대 구치소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뿐인가? 아버지가 군 복무했을 때만 해도 몸에 맞지 않는 전투복이나 전투화를 지급받는 건 예사였고 밥도 제대로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신병교육대에서 죽지 않을 만큼 구타를 당하거나 돈을 거둬 중대장이나 조교들에게 뇌물을 썼다는 것도 아버지 세대에겐 흔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편지는 아버지가 경험한 군대와 아들이 경험할 군대생활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60년대 보다야 훨씬 나아졌지만 얼차려와 구타는 여전히 존재했고, 한번 지급받은 보급품은 몸에 맞지 않더라도 바꾸기 힘들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이성문제는 곧잘 군인들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애인을 친한 친구에게 빼앗기고 절교편지를 받은 사병들이 "이 나쁜 **야, 내가 지금 간다"고 외치는 소리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 상병 애인이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면 그 사병은 바로 '관심사병'으로 특별관리(?) 됐다.

그러나 내 신병교육대 생활은 아버지의 기우와 달리 너무도 심심하게 흘러갔다.

작년 촬영했던 부모님 사진. 아들 군대 보내놓고 걱정하지 않는 부모님이야 안계시겠지만 어려웠던 시절 헌병으로 근무했던 아버지의 걱정은 신병교육대에서 매주 편지를 보내실 만큼 특별했다.
작년 촬영했던 부모님 사진. 아들 군대 보내놓고 걱정하지 않는 부모님이야 안계시겠지만 어려웠던 시절 헌병으로 근무했던 아버지의 걱정은 신병교육대에서 매주 편지를 보내실 만큼 특별했다. ⓒ 조경국
내 나름의 군 생활 요령 '중간만 하자'

사실 나는 입대 전에 군대생활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1994년 초, 가장 친했던 친구가 고참의 구타에 못 이겨 자살한 사건을 겪은 것이다. 입대한 뒤 잘 있다는 편지까지 보냈던 친구의 죽음은 내게 군대라는 곳을 '당연하게 갔다 와야 할 곳'에서 '잘못하면 생사람 잡는 곳'으로 바꿔놓았다.

친구의 묘를 다녀온 뒤, 나는 군대에 대한 모든 환상을 접었다. 그리고 입대 후에는 군 생활에 대한 요령을 빨리 익혔다. 군대에선 무엇이든 '중간만 하면 된다'는 예비역 선배들의 조언을 지키려고, 잘하는 것이든 못하는 것이든 중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구보도 중간, 뺑뺑이 선착순도 중간, 침상 정리도 중간, 밥 먹으러 갈 때도 중간, 밥 먹고 나올 때도 중간 이런 식이었다. 이것도 야밤 단체 얼차려와 구타에는 효력이 없었지만 튀거나 뒤처지지 않는 것이 편하게 군 생활하는 것이라는 선배들의 충고는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비겁했지만!

운도 따랐다. 시골 출신이었던 나는 새끼 꼬는 일을 할 줄 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동기 훈련병들이 피나고 알배기고 이가 갈린다는 'PRI'(사격술 예비훈련, 총 들고 앉았다 일어섰다 엎드렸다를 하루 종일 하는 것) 훈련을 하는 동안 세월아 네월아 하며 짚단을 엉덩이에 깔고 월동준비용 새끼 꼬는 특수임무(?)를 수행하며 무사히 신병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신병교육대의 무난한 내 군 생활 덕이었는지 아버지의 편지도 자대 배치를 받은 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동계 유격훈련 마치고 촬영했던 기념사진. 오른쪽에서 네번째 다리를 꼬고 있는 것이 본인. '오로지 중간만 하라'는 선배들의 이야기는 허튼 충고가 아니었다.
동계 유격훈련 마치고 촬영했던 기념사진. 오른쪽에서 네번째 다리를 꼬고 있는 것이 본인. '오로지 중간만 하라'는 선배들의 이야기는 허튼 충고가 아니었다. ⓒ 조경국
다시 '아버지의 편지'를 떠올리며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편지가 비록 '탈영금지'라는 목적을 띤 것이었다고 해도 내겐 '소통'의 창을 열어준 것이었다. 매일 마주하면서도 몇 마디 말조차 나누지 않았던 아들에게 매주 원고지 칸을 메워가며 관심을 보여준 아버지의 편지는 내게 답답한 군생활의 탈출구이자,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였다.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받아먹고 사는 군대라는 조직 속에서 젊은이들은 '소통의 자유'를 목말라 한다. 애인이나 친구, 가족의 편지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게 그런 이유이기도 하다. 저녁 식사시간 후 짧게 주어지는 자유시간, 부대 안에 유일했던 PX 앞 공중전화에서 고참들의 눈치를 보며 건너편에서 누군가 수화기를 들어주기 바라는 이등병의 애절함은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어떻게든 아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계셨던 아버지의 편지가 있었기에 건강하게 군 생활을 마쳤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더 좋은 건 외부와의 소통 대신 군 내부에서 사람냄새 나는 소통이 가능해 지는 일일 것이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해할 수 없는 군대 내 사건 사고도 대한민국 군대가 '소통'은 없고 '명령'만 존재하기 때문은 아닌지. 아무리 군대가 명령에 죽고 사는 곳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사병이 겪는 고통에 대해 관심 가지고 언제라도 '소통'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참, 그런데 입대 전에 '고무신 거꾸로 신어도 된다'고 말해두었던 여자친구는 어떻게 됐냐고? 결혼해서 토끼같은 딸 둘 낳고 나와 함께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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