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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해놓고 사고가 생기는 바람에 기사 쓰기를 꽤 미뤄두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참 곤혹스러운 일이다. 8월 26일에 시인 김병중씨 인터뷰를 했는데, 그의 저서를 완독하고 인터뷰 글을 써야 할 때 추락사고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어깨뼈를 붙이는 수술을 받고 실밥을 뽑은 뒤에 퇴원한 지 4주째 돼 가는 이제야 힘이 살아나 인터뷰 기사를 쓰게 되었다. 어깨뼈를 잘 붙도록 해주는 네 개 핀 가운데 두 개는 아직 남아 있다.

▲ 시인 김병중(인천 로데오거리 인근에서)
ⓒ 김선영
김병중(51)씨는 참 부지런한 시인이다. 바쁜 일과를 보내는 인천공항 세관원이면서도 벌써 시집을 여러 권 내놓았다. 그렇다고 날림으로 쓰는 시는 아니다. 게다가 <누드공항-공항에 가면 세계가 보인다>(2005년 7월 15일 동인랑 펴냄)라는 인천국제공항 세관원만이 쓸 수 있는 수필집을 내놓았다. 그런 한편 공부도 열심이어서, 중앙대 대학원에서 예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밴 그는 역시 약속장소에 온 것도 빨랐다. 늦으면 뭣하지만 약속시간보다 일찍 오는 걸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종로1가 술집 '시인통신' 맞은편에 있는 한 출판사 사무실에서였다. 그때 거기에서는 계간문예지 <언어세계>를 발행하고 있었고, 그는 편집위원, 나는 연재소설 작가로서 만났었다.

그 뒤에도 문인 여행 길에서 한 번 더 만났는데, 지난 8월 26일에 인터뷰 건으로 만나는 것은 연락을 놓은 지 근 10년 만일 것이다. 내가 입원해 있을 때 그는 시집을 두 권 더 내놓았다. <금개구리 키우기>(2005년 10월 30일 순수에서 펴냄)와 <서른하나의 사랑 수첩>(2005년 10월 30일 연인M&B에서 펴냄).

누구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세관원이 무슨 시냐?" 하지만 시인이 시만 써서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보면 어떤 직업을 가졌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시인이다. 물론 대학 교수 시인, 국어 교사 시인, 언론인 시인, 출판편집인 시인이 느낌도 자연스럽고 그 수도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농부 시인도 있고 경찰관 시인도 있고 소방관 시인도 있고 은행원 시인도 있고 군인 시인도 있는 것이다. 특히 세관원 시인은 그 수가 많지 않으므로 더 특별하고 관심이 간다. <주홍글씨>의 작가 나다니엘 호손이 바로 세관원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씨는, 시만 쓰고 사는 시인에 뒤처지지 않고 참 열심히 시를 쓰는 셈이다. 김포 '시인의 마을'에 살고 있는 것도 시작(詩作)의 부지런함에 힘을 줄 터.

<서른하나의 사랑 수첩>('서른하나'는 나이가 아니고 '연작시 31편'이라는 뜻)은 묶기 전에 남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다.

"2003년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엑스레이 판독, 여행 자료 분석 등을 하는 직원들에게 부드러움과 감성을 전해줌으로써 스트레스 해소책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근 3년간 e메일로 시 배달을 해왔던 겁니다."

인터뷰 때 '사랑'을 주제로 한 시집을 낼 것이라고 앞으로 할 일을 밝혔었는데, 어느새 그 시집을 내게 된 것이다. 연작시 '사랑수첩' 31편 외에 사랑 시 46편이 더 수록되어 있으며, '사랑수첩-하나'를 보면 이렇다.

▲ 김병중 시집 <서른하나의 사랑수첩> 앞표지
ⓒ 연인M&B
사랑은
몸장난 또는 마음장난
서로 장난하다 정이 들고
정들어 살다보면
장난이 아닌
불 또는 물이 되기

서로의 마음에
불을 당기고
다시 물로 끄다보면
어느새 식어버린 시간 위에
향기롭게 피어나는 세월꽃
그 꽃 속에 남는 여문 씨 하나
-<서른하나의 사랑 수첩> 12쪽


<서른하나의 사랑수첩>에 비하면 <금개구리 키우기>는 다소 어려우며 행간 속에 '사랑'이 숨어 있다. 본격시의 냄새가 물씬 난다. '아버지'를 보면 이렇다.

▲ 김병중 시집 <금개구리 키우기> 앞표지
ⓒ 순수
아버지는 날마다
말없는 길이 되었다.
어두운 산을 넘어
더 높은 산을 넘는 길
나는 밤마다 달을 따라
아버지와 걸었다
아버지의 길이지만
가다보니 내가 길을 내며 가고 있었다
가풀막진 낯선 길을 지나
길이 넓어지고 있었다
아아, 아버지를 찾아 가면서
내가 길에 길들여지고
내가 길이 되어가면서
나는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금개구리 키우기> 22쪽


▲ 김병중 수필집 <누드공항> 앞표지
ⓒ 동인랑
이 시의 행간에는 '아들을 인도하는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사랑'이 담겨 있다.

성실한 세관원으로서 26년간 근무하는 동안 훈·포장과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등을 19차례나 받았으니 어지간히 성실한 공직자다. 그의 원래 꿈은 시인이 아닌 전업작가였다. 그러나 공직생활에 충실하면서 그 꿈은 일단 접어두어야 했다. 그러나 가물지 않으면서도 빛나는 시를 써내고 있으니 중견문인으로서 할 일은 충분히 하고 있는 셈이다.

또 그는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듯 보이는 몇몇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지 않으면 격이 떨어진다'는 선입견을 무너뜨려 주는 본격시인이다. 또한 그는 "시를 키우다가 시에 빠져 죽겠다"고 말하는, 시창작 없이는 못 사는 본격시인이다.

서른하나의 사랑수첩

김병중 지음, 연인(연인M&B)(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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