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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풍수가 그렇게 좋다는 삼각산(북한산) 도선사 부근에 다녀온 일이 있다. 그 근처에 사는 한 시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시내버스로 삼각산 아래에 도착한 순간, 나는 폐 속으로 시원한 공기가 통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숨쉬기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다세대 집 20평형을 마련하여 내가 10년째 살고 있는 고장의 황사와 탁한 공기를 생각하니 갑자기 신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뿌연 하늘과 파란 하늘과의 차이, 나무 없는 언덕과 나무 무성한 언덕과의 차이, 그런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두 공간 사이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시인의 체취가 숨김없이 묻어나는 책

▲ 이기철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앞표지
ⓒ 문학동네
책에서도 그런 냄새가 난다면? 아마 샘물처럼 순결하면서도 진흙처럼 짙은 시인 특유의 냄새가 난다면 그러할 것이다. 시인의 냄새가 나는 책이 과거에도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특히 시인의 체취가 숨김없이 묻어나는 책이 최근에 나왔다. 시인 이기철의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시인의 풍경'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수녀 시인 이해인이 '시인들의 시와 모습을 시적으로 그려낸 아름다운 풍경화'라고 촌평한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에는 모두 21명의 시인이 그려져 있다. 시인 신경림에 대하여 이기철은 이렇게 말한다.

시인 신경림. 그의 가슴속에는 기쁨이 많을까, 슬픔이 많을까? 시를 보면 슬픔이 많을 것 같고 사람을 보면 기쁨이 많을 것 같다. 그는 언제나 즐거운 표정, 웃는 얼굴이고 더러는 어울리지 않게 깔깔대며 가가대소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염무웅씨의 말인즉, "신경림은 그래서 늙지 않는"단다.
-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40쪽에서


고은은 고함을 지를 줄 아는 시인

이기철이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에서 '공연한 찬사가 아니다. 고은 시인은 큰 시인이다. 그는 고함을 지를 줄 아는 시인이다. 저 협잡과 사기와 오물로 뒤덮인 현실들을 발길질도 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 큰 그릇이 그렇게 많은 두들김에도 오래 깨어지지 않고 용케도 잘 견딘 시인이다'라고 찬미한 시인 고은. 그는 1974년 3월 14일자 일기에 '아무래도 술이 내 조상인 모양이다. 술에 경배할지어다'라고 썼을 정도로 술을 좋아한다. 이기철은 시인 고은과 자신과의 술에 얽힌 에피소드를 이렇게 스케치했다.

칠포해수욕장. 나보다 앞 차로 해수욕장에 도착한 고은 시인은 벌써 얼굴에 주기가 돌고 있었고 손에는 소주병이 들려 있었는데 벙거지를 쓴 시인이 모래 위에 놓인 평상에 앉아 있는 정공채 시인과 나에게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놋쇠 술잔에 소주를 주르르 부어 내 코앞에 내밀었다. 아마도 내가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던 탓이리라. 나는 손을 저어 술을 사양했는데, 시인은 한술 더 떠, 나에게 한 주먹을 다른 손에 넣어 내밀어 보이는 소위 '쑥떡'을 먹이는 것이었다. 나는 우습고 황송해 벌떡 일어나 소주잔을 받았다.
-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54쪽에서


이기철은 고은의 그런 몸짓을 '나이에 관계없는 시인의 천진난만함'이라고 표현했다.

황동규의 시는 흐르고, 박목월의 시에는 소로를 스치는 맑은 바람이 있다

시인 황동규와 박목월에 대해서는 각각 이렇게 찬미했다.

우리 시대 시의 연금술사로 불릴 수 있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황동규다. 황동규 시인의 시에는 매편 청동불빛이 번쩍거린다. (중략) 황동규 시인의 시는 늘 흐른다. 흐르기 때문에 변한다.
-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62쪽에서

박목월의 시에는 김소월이 다 말하지 못하고 남겨둔 소로가 있고 소로를 스치는 맑은 바람이 있다. 도란도란 흐르는 도랑물 소리가 있고 굽이 잦은 시골길이 있다.
-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94쪽에서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시인과의 추억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유치환, 조향, 박남수, 김현승, 김춘수, 김규동, 신동집, 박재삼, 조병화, 이성선, 이해인, 황금찬, 정진규, 유안진, 임영조, 오세영, 오탁번의 시인 모습과 시가 읽기 재미있게 다루어져 있다. 이기철은 이 책에서 자기가 만난 시인의 이야기만 썼다. 풍문으로만 듣고 아는 시인의 이야기를 실증(實證)도 없이 쓰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사십 년 동안 시를 써오면서 세상의 슬픔을 자기 슬픔처럼 끌어안고 세상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보듬는 시인을 많이 보아왔다"고 말하는 시인 이기철. 그는 "그분들의 삶이 수놓인 시, 그분들의 정신의 정화인 시의 언어를 읽을 수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메마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여겨진다"고 고백했다.

이기철은 뛰어난 시인들과 더불어 시의 길을 여행한 그 아름다운 추억을 그대로 묻혀 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기가 만나고 이야기했던 시인들의 이야기를, 자기가 읽거나 들은 시인들의 나지막한 음성을, 그들의 아름답고 즐겁거나 슬프고 아픈 이야기들을 혼자 기억해서는 세상 독자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아니겠는가.

시인의 풍경화를 그린 시인 이기철의 풍경은?

이기철

▲ 이기철 시인
ⓒ문학동네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영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현대문학>으로 시단에 데뷔했고, 1976년부터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 대구시인협회장을 역임했고 2005년 현재 영남대 교수로 재직중.

시집으로 <청산행>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열하를 향하여> <유리의 나날> <가장 따뜻한 책>, 소설집 <땅 위의 날들> <리다에서 만난 사람>, 에세이집 <손수건에 싼 편지>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시와시학상, 최계락문학상, 대구광역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그렇다면 정작 시인 이기철을 그린 풍경화는 어떤가? 고은은 이기철을 이렇게 시로 그려내었다.

산중인가,
그는 누가 부르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누가 불러내면 그때에야 호젓이
나타난다.
그는 그렇게도 적광(寂光)의 꽃이다.

그의 품위 있는 기의 경지는 시에 대한
품위 있는 성찰을 고스란히 동반한다.

어느 날 그가 저녁 바다 복판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천 년의 섬이 되어 있었다.

시인 이기철!
-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뒤표지에서


고은의 묘사대로라면 '천 년의 섬이 되어 있는' 이기철은 독자들에게, "이 세상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 시를 쓴 시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인과 말을 하고 그 시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 시인은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나는 것입니다"라고 다정하게 가르쳐 준다.

시를 좀 더 재미있게 읽고 가슴에 와닿게 감상하려면, 시인을 그저 신비한 존재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그의 체취에 간접적으로라도 다가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는 그래서 향기가 좋다.

덧붙이는 글 |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이기철 지음/2005년 8월 22일 문학동네 펴냄/211×154mm 224쪽/책값 8500원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 시인의 풍경

이기철 지음, 문학동네(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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