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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운다> 책표지
<들이 운다> 책표지 ⓒ 리북
11월 15일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집회를 마친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과 문정현 신부는 <들이 운다>라는 책을 미 대사관측에 전달하려다 저지당했고 책은 땅에 팽개쳐졌다.

아마도 현장의 경찰에겐 그 책이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트로이 목마 같은 간계로 간주되었을 터이다. 하지만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처럼 책장에 독이 묻었다거나 스파이 영화에서처럼 알맹이를 도려내고 폭탄을 숨겼다거나 한 일은 없었다. 책과 함께 전달하려 했던 항의서한은 항의서한이고, 읽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려고 했든 간에 책은 책이다. 도서 증정 행위였던 것이다.

그런데 책은 땅바닥에 팽개쳐졌다. "석유보다 중요"하고(박정희), 바로 "공산주의"(김일성)이기조차 한 쌀이 길바닥에 쌓여야 하는 이 시대에 책 한 권 땅에 떨어진 정도는 사치인가.

그리고 책이 떴다.

유명 인사들의 박수와 환호 속에 몇 권의 책이 떴다. 성황리에 사인회, 출판기념회 등을 마친 <나 돌아가고 싶다>(10월 27일), <수채화 세계도시기행>(11월 3일),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11월 5일), <박진감 넘치는 돌고래 다이어트>(11월 14일)가 이 독서의 계절에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다.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개천(開天) 이래 출판계 최대 불황의 바닥을 치는 반등의 신호탄을 한국 사회의 리더들이 솔선수범하여 일제히 쏘아올린 것인가.

벌써 대번에 알아차렸겠지만, 지금 거론한 다섯 권의 책을 이렇게 하나의 글에서 싸잡을 수 있는 끄트머리는 바로 '출판기념회'이다.

<들이 운다>도 그날 그렇게 차가운 땅바닥에 팽개쳐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루떡과 막걸리를 곁들인 <들이 운다> 출판기념회도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대추 초등학교 비닐하우스 안에서 열렸다.

<들이 운다>는 평택 미군기지 문제를 중심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평화 운동을 벌이는 단체 '평화바람'이 지역 주민들을 인터뷰한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부제는 '땅을 지키려는 팽성 주민들이 살아온 이야기'이다(리북/1만5000원).

<나 돌아가고 싶다>는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어린시절의 가난과 고학, 소박한 사랑 등 지난날을 회고한 자전적 에세이다(행복한집/9500원). <수채화 세계도시기행>은 같은 당 이재오 의원이 도시공학 박사 원제무 교수와 함께 쓴 세계 19개 도시 답사기이다(시사플러스/1만1000원).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이 청계천 복원 과정을 기술한 경제경영적 성격이 강한 자전적 에세이다(랜덤하우스중앙/1만2000원). <박진감 넘치는 돌고래 다이어트>는 한나라당 박진 의원의 다이어트 성공기이다(넥서스/1만원).

이렇게 단신 성격의 신간 안내로 묶지 않는다면, 그리고 10~11월에 걸쳐 출판기념회를 가졌다는 사실을 빼고서는 이 다섯 권의 책은 어떤 관련도 없어 보인다.

책의 저자라면 출판기념회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서 나쁠 것은 전혀 없다. 아니 출판기념회는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들이 운다>를 제외한 나머지 네 권의 도서 또는 출판기념회라는 '텍스트'가 어쩔 수 없이 포괄될 수밖에 없는 '서울시장 선거'와 무슨 무슨 '출사표'라는 '컨텍스트'를 아무리 간과하려 해도 간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 <들이 운다> 출판기념회는 로맨스고, 공교롭게도 같은 정당 소속의 저자가 써서 특정한 타이밍에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나머지 네 권의 출판기념회는 불륜인가? 불륜은 아니지만 우연도 아니며 분명 미필적 고의에 비견된다.

출판기념회에서 출사표를 던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출판기념회가 어느 기자의 표현처럼 요즘의 정치권 '풍속도'가 된 이유가 있다. 내용을 일단 차치하고 책이라는 매개는 매우 중립적이며 문화적이다.

또한 어떤 출판계 선배의 말처럼 "미디어의 다원화, 다각화 시대에 이제 '사내라면 트럭 다섯 대 분량의 책은 읽어야 한다'거나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식의 강권(强勸)을 할 수 없는" 시대라고는 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책을 매개로 삼은 의사소통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을 막론하고 부드럽고 지적이며 멋진 신사 숙녀들의 행위에 속한다.

속성은 크게 다를 바 없으나 미국처럼 외견상으로나마 세련된 정치 집회를 아직 연출해내지 못하는 후진적인 정치 문화 속에서 출판기념회는 썩 훌륭한 대안이다. 설사 출판기념회를 '빙자'했더라도 크게 미욱한 짓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 의식이라고 곱게 봐주면 좋고 계급의식, 편들기, 운동권 버릇 등등 온갖 꼬리표를 달아도 좋지만, 내 자식 좋은 것 입히고 좋은 것 먹이면서도 보살핌 없이 개에 물려 죽은 아이 소식에 눈물 올라오는 게 인지상정이고 밥과 술이 넘어가다가도 길바닥에 피 흘리며 쓰러진 농부들 소식에 턱 막히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상찬과 덕담, 장도를 축원하는 박수 소리, 화사한 웃음소리 넘치는 출판기념회 저편에서 차가운 땅에 내동댕이쳐지는 책 한 권이 눈에 밟힌다.

출판 편집자도 언론인 못지않게 공평무사하고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했던가. 내 나름대로 사유의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은 이 다섯 권의 책에 대한 무심한 인상비평에 그쳐 보자.

<들이 운다>의 표지 주색상은 노랑이다. 노란 황새울 들판은 가을이라는 계절, 그리고 날로 쌀쌀해지는 계절감에 대비된 따뜻함과 조화롭지만, 하늘이 노란 막막한 절망과 답답함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나 돌아가고 싶다>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박진감 넘치는 돌고래 다이어트>의 컨셉트는 역시 인물 사진 비주얼이다. 편집자나 디자이너는 이처럼 지명도 있고 성격이 분명한 자전적 에세이류에 인물 사진을 쓰는 데 크게 이견을 제기하지 않는다.

정치인보다는 자연인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는 책이기 때문에 <나 돌아가고 싶다>의 저자 홍준표는 아련한 '나의 살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표지 그림과 어울리는 터치의 캐리커처를 썼다.

<박진감 넘치는 돌고래 다이어트>는 마찬가지로 인물 비주얼, 따뜻한 색감의 표지에 과감한 블루 띠지 디자인을 구사했다. 돌고래라는 중요한 비주얼 때문에 겨울철에 선뜻 선택하지 않는 차가운 색상을 선택했는데 '블루 오션'이라는 베스트셀러의 트렌드와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것은 결코 불리하지 않은 마케팅 포인트일 것이다.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도 마찬가지로 인물 비주얼의 카리스마를 정석대로 살렸다.

그리고 세 정치인은 다들 웃고 있다.

요즘 출판사의 편집자와 영업자는 매우 자주 수준급의 카피라이터가 되어야 한다. 책 도처의 문안(표지 문안, 목차에 드러나는 책 내용의 각 꼭지 제목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제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박진'이라는 이름까지 제목에 살린 <'박진'감 넘치는 돌고래 다이어트>는 주절주절하지 않으면서도 동원 가능한 모든 긍정적 키워드와 이미지 연상(돌고래-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바다-블루 오션 등)을 잘 집약해 냈다.

당면한 싸움의 최전선에서 여느 출판사들처럼 책에 집중해 오랜 시간 머리를 맞댈 시간이 없었을 것 같은데 <들이 운다>라는 제목 역시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민중의 소리> 배혜정 기자의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그래도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취지의 '들이 웃네'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야 한다는 취지의 '들이 운다'가 제판 송고 이후까지 제목 경합을 벌이다가 결국 '들이 운다'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출판기념회에서 그들은 모두 울고 말았다.

서평도 아니고 어떤 단체나 정당의 논평도 아닌 출판기념회평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거론한 책들의 출판기념회와 관련된 낙수 몇 토막이다. <민중의 소리> 배혜정 기자, <오마이뉴스> 김당 기자의 기사에서 다시 인용하였다.

"책을 보니까 슬프네… 말년을 이곳에서 마쳐야 할 텐데… 명절 때면 도시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느라 바쁜데 고향 버리고 나가라니 안 슬프겠냐."(<들이 운다>/ 주민 김석경 할아버지)

"어쨌든 이런 책이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 이런 슬픈 내용을 담은 책이 나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불행한 사건이 아닌가 싶다."(<들이 운다>/ 도두리 새마을 지도자 한승철씨)

"어제 평택 역 촛불행사 때 사람들과 글 하나를 읽다 너무 처절하고 절절해서 모두가 울었다."(<들이 운다>/ 문정현 신부)

"정치를 하다 보면 의정활동에 바빠 책 한 권 제대로 읽기도 힘든데 박 의원은 빛나는 의정활동을 하면서도 책을 썼다."(<박진감 넘치는 돌고래 다이어트> /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당이 예산 투쟁을 비롯해서 '세금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출판기념회도 한 번씩 했으니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후보자들은 이 정도로 자제해야 한다."(강재섭 한나라당 원내대표)

"한나라당 소속은 물론 여당 쪽 사람 어느 누구라도 서울 시장에 출마할 의향이 있는 사람은 앞으로 자기 저서 출판 기념회 장소는 필히 청계천으로 변경 요망/서울 시장 자리의 진면목과 대권 주자의 야심작이 무엇인지를 현장 학습하는 효과를 기대해야 하기 때문에."(한 네티즌)

들이 운다 - 땅을 지키려는 팽성 주민들이 살아온 이야기

평화유랑단 평화바람 엮음, 리북(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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