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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 파키스탄 대지진 현장의 텐트촌을 방문하여 피해주민을 위로하고 있는 한명숙 의원(APPCED 제5대 집행위원장)
11월12일 파키스탄 대지진 현장의 텐트촌을 방문하여 피해주민을 위로하고 있는 한명숙 의원(APPCED 제5대 집행위원장)
파키스탄 도착 이틀 째. 날이 채 밝기도 전 새벽녘에 어렵사리 눈을 떴습니다. 오늘은 이번 파키스탄 지진의 최대 피해지인 카슈미르에 가는 날입니다. 파키스탄 령 카슈미르주는 인구 250만의 작은 자치주입니다.

파키스탄 독립 이후 인도와의 영토분쟁으로 촉발된 종교분쟁이 최근까지 이어져 심각한 내홍을 앓고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저희 의원단은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구호품과 성금을 전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카슈미르주의 수도 무자파라바드로 향했습니다.

지진으로 육로가 끊기고 복구마저 완전하지 않아 차량이 아닌 헬기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헬기 아래에 펼쳐진 카슈미르는 정말이지 암담한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은 말 그대로 폭삭 주저앉아 온전한 건물의 형태를 찾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대부분 주택이 철근 하나 들어가지 않은 블록으로만 세워져 지진 피해가 훨씬 더 컸다고 합니다. 마치 납작하게 쓰러진 도미노의 행렬처럼 끝도 보이지 않는 건물의 잔해가 길게 늘어 서 있습니다.

카슈미르는 산악지대입니다. 첩첩산중, 가도 가도 산입니다. 벌건 민둥벌거숭이 산이 끝도 없이 지루하게 펼쳐집니다. 사람들은 그 붉은 산마루와 중턱에 작은 촌락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이 헐벗은 산에서 대체 무엇으로 연명할까 궁금할 지경입니다. 풀이 있어 목축을 할 수도, 물이 귀하고 땅마저 척박해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황무지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식수로 쓸 물을 길으려면 산 아래 계곡까지 내려가야 한다니 애초부터 농사는 꿈도 꾸지 말아야할 사치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뒷마당에 작은 텃밭을 일구어 먹을 양식을 재배한다고 하니 궁하면 통한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붉은 산 사이에는 실핏줄 같은 좁다란 길들이 촘촘한 그물처럼 엉켜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번 강진으로 마을과 마을을 간신히 이어주던 좁다란 길들마저 끊어져 구호품을 제대로 전달할 방법이 없답니다. 그제야 공항에 싸여 있던 구호물자에 대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열악한 운송수단과 길이 끊겨 구호품을 제 때에 전달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간간히 헬기가 떠 구호품을 투하하지만 이재민의 수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해 빵 몇 조각으로 온 식구가 일주일을 견뎌야하는 일이 허다하다고 합니다. 언제 올지도 모를 구호의 손길만 기다리며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죽음과 싸워야 하는 이재민을 생각하니 슬픔보다는 까닭모를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릅니다.

세계화라는 말이 참으로 무색합니다. 세계화라는 말이 잘 사는 나라들만을 위한 구호는 아닐 것입니다. 인류가 서로 교통하며 서로의 가진 것을 나누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세계화의 참의미라고 저는 믿습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면서도 천형과 같은 가난과 재앙을 숙명처럼, 원죄처럼 감내해야 하는 이들을 보며 답답한 가슴에 한 숨만 나왔습니다.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한 지 한 시간 반이 다 될 무렵 카슈미르의 수도 무자파라바드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카슈미르 자치 정부의 대통령과 총리를 만나기 위해 총리 관저로 향했습니다. 총리관저로 향하는 도중에 마주한 무자파라바드는 헬기에서 내려단 본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무자파라바드는 도시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참담하게 붕괴되어 있었습니다. 무너진 건물 숲을 따라 간신히 길들만 복구되어 있습니다. 거리에는 붕대를 감은 주민들이 표정 잃은 얼굴로 힘없이 앉아 늦가을의 햇볕을 내리쬐고 있습니다. 어쩌면 따뜻한 햇살만이 그들의 유일한 치료방법인지도 모릅니다. 병원이 무너져 의사들이 사망하는 바람에 치료할 의료진과 의약품이 없어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지금도 고통에 신음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너진 건물을 파헤칠 포클레인은 고사하고 삽마저 부족해 맨손으로 복구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곧 들이닥칠 겨울의 한파에 대비한 모포와 텐트, 의복, 식료품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고 단지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사람들만 덩그렇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마지막까지 웅크린 채 남아있던 희망이라는 보루처럼 그 처절한 붕괴의 현장에서도 희망의 싹은 여지없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작고 볼품없지만 좌판이 벌어져 장이 서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자, 무, 양파, 귤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희망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현지인들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순응이었습니다. 비록 그 날의 공포로 자다가도 비명을 질러댈 정도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신이 주신 고통을 달게 감수하며 살아가는 자세는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입니다. 그 커다랗고 해맑은 눈동자로 폐허의 공터를 뛰어 놀던 아이들. 저를 향해 수줍게 다가서는 아이들의 바스러질 것만 같은 좁은 어깨를 껴안으며 까닭 모를 부끄러움으로 코끝이 시큰거렸습니다.

이윽고 총리관저에 도착했지만 저희 일행은 다시 한번 놀라야 했습니다. 이유는 총리 관저 역시 무너져 정부의 총리가 마당에 텐트를 치고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대통령과 총리를 만나 모금한 구호품을 전달했습니다.

비록 적은 양의 구호품이지만 카슈미르 자치주 대통령과 총리는 저희 방문단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의 뜻을 전해왔습니다. 물품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통해서인지 파키스탄 정부는 우리 대표단을 극진히 대접해 주었습니다.

또 파키스탄 의회 의원들과 여러 차례 환담을 나누며 허물없는 돈독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의미가 이런 것이었나 봅니다. 그들은 작은 정성에도 충분히 감동했고 선뜻 마음을 열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대한민국이 세계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를 고민해 봅니다.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급속한 경제성장, 한류열풍, 올림픽과 월드컵을 훌륭하게 치러 낸 나라. 불과 오십 년 전 세계인의 눈에 비친 모습과는 분명 천양지차의 시각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봉사하고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한국이라는 이미지는 결코 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제 한국도 세계의 어려움에 동참할 때입니다. 단지 경제력만으로 군사력만으로 힘을 과시하는 나라가 아닌 진정한 인류애와 평화를 전파하고 선도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공존과 나눔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희망의 나라라고 저는 믿습니다.

덧붙이는 글 | 타 매체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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