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의 글을 읽으면 그 사람과 일면식이 없음에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때문에 비록 활자를 통해서 이긴 하지만 공감하는 책이나 글을 만나게 되면 글쓴이와 충분히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내게 있어 책을 읽는 순간 내 마음을 가장 따뜻하게 해주고 또 감동을 주는 저자중의 한사람 꼽으라면 단연 한비야씨다.
내가 한비야씨의 책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푸른숲)를 통해서였다. 그 첫 느낌은 '음, 참 밝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사람이구나'였다. 그 후 <한비야의 중국 견문록>을 읽었는데, 중국어 공부를 어쩜 그렇게 재미있고도 효율적으로 하는지. 나중에 중국어 공부 할일이 있으면 한비야씨의 공부 방법을 참고해야지 다짐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에서의 한비야씨는 '밝고 유쾌하다'였는데 <중국 견문록>을 읽으면서는 시종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추가로 받았다. 그 느낌은 앞으로 한비야씨가 책을 내면 무조건 사봐야지 하는 신뢰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책은 쉬이 나오지 않았고 그는 긴급구호요원으로 가난한 나라들을 누비고 다녔다. 언젠가 TV에서 보니 너무 바빠서 그의 일주일 잠 분량이 나의 하루 잠도 안 되는 것을 보고 세상에나, 너무 충격이었다. 아니 그러고서 어떻게 산대유?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 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하느님이 그에게만은 특별히 시간을 하루 24시간이 아닌 한 30시간쯤 주어서 스물네 시간은 일하고 나머지 6시간은 잠 좀 자게 할 수는 없는지.
바람의 딸,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다
아무튼 이번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새 책 <지구 밖으로 행군하라>(푸른숲)가 나와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지구 밖으로 행군하라>를 읽고나서야 나와는 영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여 남들에게 사보라는 선전만 열심히 하고 정작 본인은 읽지 않았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1,2,3,4>(도서출판 금토)를 사게 되었다.
이 책을 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책에 대한 기대보다 한비야씨의 책이니까 공감하는 부분이 적더라도 '그냥 읽어두자'는 정도의 기분으로 샀다. 아니,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공감하는 부분이 적어도라니?
사실 나는, 여행에 대한 꿈은 늘 갖고 있지만 '오지 여행'은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세계여행 속에서의 '오지'하면 먼저 '도전 지구 탐험대'라는 프로가 떠올랐다. '도전 지구 탐험대'에서 본 오지는 애벌레 같은 것을 먹어야 되고 맨발로 밀림을 걸어야 됨은 물론 독이 있는 뱀, 거미, 개미, 모기 등 무서운 것 천지의 세계였다.
지금은 한비야씨 하면 '긴급구호팀장'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지만 그 전엔 '오지여행가 한비야'씨였다. 수년전 서점에서 책표지로 본 그는 오지 여행을 끄떡없이 해내게 단단하게 생겼고 자신만만 했다. 때문에 나는 그 책들에 별(?) 호감을 못 느꼈다. '오지'라니. 내 선입견으로는 호기심은커녕 생각만 해도 무서운 곳이었기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 속물이 가고 싶은 곳에 그가 갔다 왔다면 호기심이 생겨서 책표지를 한번 펼쳐 봤을 테지만 당시의 나는 책표지만으로 충분했다. 때문에 나는 이 좋은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하여간 '뒷북'은 알아 줘야 된다고나 할까.
9·11테러 이전의 내 동경은 유럽에 국한되었었다. 세계지도를 펴면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오세아니아 등 지구본 골고루 나라들이 분포되어 있지만 유럽 사대주의자에게 다른 지역들이 안 보였다.
그러나 9·11이후, 이슬람 세계에 관심을 가지면서 '오호!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하는 친근함이 일었고 그 연장선상의 아프리카도 넘보게 되었다.
어, 그런데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1>의 첫 장을 넘기니 한비야씨는 그의 첫 저작을 다른 누구도 아닌 '아프리카와 중동에 흩어져있는 난민 어린이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왼다리와 오른팔이 잘려나간 채 꼬질꼬질한 손으로 내게 빵을 건네주었던 꼬마친구에게 바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비야씨가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이 이토록 오래 되었다니. 나는 한비야씨의 긴급구호 일이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고, 영어도 모자라 중국어까지 '솰라솰라'하고나니 보다 더 자극적이면서도 보람도 있는 일이 필요하여 긴급구호에 뛰어든 줄로 생각했다.
감상으로 시작했더라도 그는 정열과 능력이 있으니 긴급구호일도 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얼마나 부끄러운 선입견이었는지. 나는 왜 그런 생사람 잡는 선입견을 가졌는지 생각할수록 부끄럽다.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네 권은 오지여행의 무용담도 무용담이지만 그보다 세계구석구석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나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이 곳곳에 배어있는 책이다.
알고 보니 중국어를 배운 것도 여행 편하게 하고자 배운 것이 아니었다. 영어에다 스페인어 그리고 일어가 되다보니 거기다 중국어만 보태면 긴급구호 일을 하는데 여러모로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배운 것이었다.
풍경만이 아닌 사람들과 정을 통하는 여행
잠들기 전 큰애는 늘 옛날 얘기를 해 달라고 하는데 소재의 고갈로 언제부터인가 늘 핑계대기 바빴다. '오늘은 엄마가 피곤하니 그냥 자자'.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그냥자자', '오늘은 그동안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 더 이상 이야기거리가 없다. 얘기거리가 좀 모이면 그때 다시 해줄게…'등등 하루 걸러 한번씩은 꼭 핑계를 댔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나마 하루 걸러 한번씩 하던 옛날 얘기도 막상 시작하려면 떠오르는 게 없어서 늘 "옛날 옛날에… 음, 아주 옛날 옛날에…"하며 뜸을 몇 번 들이다가 겨우 들려주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리고 시작하는 말도 달라졌다.
즉, 다름 아닌 "한비야 아줌마가 말이다…"이다.
"한비야 아줌마가 말이다. 이번엔 터키를 가게 되었어. 우리 저번에 TV에서 같이 본 카파도키아 말야. 그곳을 한비야 아줌마가 직접 가봤다는 것 아니겠니. 가서 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돌로 된 방에서 하룻밤 잤대. 재미있겠제, 아니 무서웠을까…."
"한비야 아줌마가 말이다. 이번엔 아프리카의 케냐를 가게 되었어. 케냐 알지? 마라톤 잘하는 나라 말야. 케냐의 아주 산골 마을에는 마사이족이라는 부족이 살고 있어. 그런데 그 사람들은 밥은 먹지 않고 우유만 먹고 산대. 한비야 아줌마가 가니 밥은 안주고 우유와 차만 주었지. 그래서 한비야 아줌마는 너무 배가 고파서 통역하는 사람에게 왜 밥은 안주냐고 물었더니 마사이족은 점심은 안 먹고 아침저녁으로 우유만 마신다고…."
이 책에 나오는 실화를 주로 얘기해주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허구도 가미하면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던 옛날 얘기보다 훨씬 재미있고 내용도 알차고 교훈적이다.
"세상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아이들이 그 얼마며, 비가 너무 와서 큰일인 나라가 있는가 하면 제발 비 좀 왔으면 소원이 없는 나라도 있단다" 고작 7살인 아이에게 너무 무거운 얘기를 했나 싶을 때는, "한비야 아줌마가 모기에 물렸는데 너무 가려워서 말야…"하면서 온몸을 박박 긁는 것을 녀석의 몸에다 직접 시연해주면 깔깔깔 넘어간다.
아무튼 아이들에게 '세상의 넓고 다양함'을 얘기해 줌에 있어 이 이상 더 좋은 책이 없을 것이다. 이 책 4권 분량의 얘기들이 내 아이의 머릿속에 모두 들어가면 녀석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세계화가 될 것이다.
현재 아이는 미국이 힘이 제일 세서 미국이 제일 좋다고 하지만 한비야씨의 여행기를 잠결에 들으며 몇 년 보내면 저도 모르게 세상 모든 나라가 저마다의 향기와 빛깔이 있고 또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어른들 마음의 세계화에도 꼭 필요한 책이다.
덧붙이는 글 | 1권만 읽고 만 분들에게 드리는 힌트
이 책이 얼마나 많이 읽혔나 살펴보니 1권은 55쇄, 2권은 33쇄, 3권은 24쇄, 4권은 22쇄 찍은 걸로 되어 있다. 즉, 독자들이 1권은 너도나도 사보았는데 4권까지 다 사본 사람은 절반 정도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1권만 읽고 나머지를 안 읽으신 분들 분명 후회합니다. 1권부터 4권까지 다 읽어야 ‘마음속의 세계화’가 완벽하게 구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