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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철 <내가 굽는 것은 희망이고 파는 것은 행복입니다> 앞표지
ⓒ 해냄
나는 시인이며 소설가인 이영철은 알지만 그 밖의 이영철은 아는 이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또 한 사람 이영철을 알게 되었다. 직접 만나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새로운 ‘이영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인천 동암역 남광장 앞의 <영철 street 버거> 가맹점에서 빵 속에 돼지 등심살과 양배추, 청양고추 등의 야채를 섞어 구은 것이 들어 있는 특이한 버거를 공짜 콜라와 함께 먹으면서 새로운 ‘이영철’을 알게 되었다.

이영철씨는 고대 앞에서 자기 이름을 딴 버거 장사를 하는데, 가맹점 주인 아주머니의 말인즉, 이영철 사장은 하루에 1500개나 판다는 것이다. 이 버거는 한 개에 1000원인데 펩시콜라가 공짜. 한 개마다 많이 남기지는 못해도 워낙 많이 팔리니까 돈벌이가 되었다. 그래서 많이 팔아준 고려대학생들을 위하여 장학금도 내놓았다. 그것이 고대에서 유명한 ‘영철 street 버거 장학금’이다.

그런 이영철씨가 자신의 삶을 담은 책을 펴냈다. <내가 굽는 것은 희망이고 파는 것은 행복입니다>(2005년 11월 7일 해냄 펴냄). 간신히 고비 고비를 넘겨 현재에 이른 이씨의 삶은 구성이 잘 된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하다.

이제는 “‘이영철’을 모르는 고대생은 가짜 고대생”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자, 그런데 어느덧 전국에 40개의 가맹점마저 생기게 한 ‘이영철’씨는 따로 경영학을 공부했을까? 경영학은커녕 중학교 문에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집안이 어려운 데다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고생하다 숨을 거둬 초등학교 때 학업을 중퇴하고 말았다.

고려대에 장학금까지 내놓을 만큼 성공한 장사꾼이 되었지만, 그 자리에 오기까지 그가 겪은 시련은 너무도 힘겨웠다.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어느 날 허리를 다쳤다. 그때부터 화투에 경마까지 하면서 돈을 날리기 시작했다. 결국 2만 2000원밖에 남지 않았을 때 처가살이를 하기 시작했다. 처가에 세를 들어 살던 동서에게 50만 원을 빌렸고 그 돈을 밑천으로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영철 버거는 아니었다. 떡볶이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많이 팔아도 남는 것이 없었다. 오뎅을 추가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순대를 추가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재료상의 젊은 사장이 귀띔을 해주었다. “외국에서 고기랑 양배추랑 볶아서 핫도그 빵에 끼워 파는데 인기더라, 그런 신제품을 한번 개발해 봐라”는 내용이었다.

이문동 외대 앞 골목에서 시작했는데, 장사가 잘 되자 주위 장사꾼들이 떠나 줄 것을 강요했다. 자기네들 장사가 안 된다는 거였다. 그래서 우선 타우너에 과일을 싣고 다니며 파는 과일장사를 하다가 안암동 로타리 근방의 한 장소를 발견했다.

2000년 초가을, 그것이 바로 고려대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노점상 집중단속에 걸리는 등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성공이 찾아왔다. 장사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허용해 준 건물 주인이나 영철버거를 찾는 고려대 학생들한테서 인덕(人德)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어린 시절에 상경하여 중국집, 옷 공장 등에서 고생하던 이야기, 웨이터 생활, 여자 집안에서 반대하는 아내와의 동거 이야기 등이 주르륵 영상처럼 펼쳐진다. 이영철씨 이야기가 감동으로 와 닿는 것은 그만큼 꾸밈없이 솔직하게 썼기 때문이다.

1000원으로 펩시콜라를 무료로 내놓으면서 영철버거를 파는 일, 대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1000원짜리 자장면을 내놓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1000원짜리 자장면은 단순히 값을 내린 것인 데 비해 '영철 street 버거'는 값이 쌀 뿐만 아니라 이영철씨가 발명한 새로운 음식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영철, 그는 경제가 어려운 시대에 나올 수 있는 용기 있는 성공인이다.

내가 굽는 것은 희망이고 파는 것은 행복입니다

이영철 지음, 해냄(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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