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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격 유지'의 트릭과 '간격 좁히기'

장벽의 붕괴 이전, 전후 독일사의 가장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던 68학생운동이 남긴 가장 커다란 합법적 유산이 무엇인지를 독일인들에게 묻는다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녹색당과 언론사 타쯔(taz, die tageszeitung)를 들 것이다.

둘은 여러모로 유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68학생운동의 한 부산물로 돌멩이에서 칼빈총에 이르기까지 모든 폭력적 시도가 좌절된 70년대 말, 합법적 경로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음이 68학생운동의 거의 모든 잡동사니 정치세력에게 분명해진 그 시기에 녹색당과 타쯔는 등장했다.

▲ <신화를 쓰는 마라토너 요슈카 피셔>
ⓒ 궁리
합법을 지향했지만 생경했던 녹색당의 구호나 조잡스러울 정도로 찌라시에 가까웠던 타쯔의 논조는 나치 전력을 가진 전전세대에 대한 전후세대의 반항적 상징이었다. 그들의 구호나 논조만큼 그들의 형식 또한 기성의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은 전설이 되어 버린 녹색당의 의원 로테이션제(2년마다 의원을 교체하는 것)만큼이나 편집장과 청소부가 같은 월급을 받는다는 타쯔의 임금 체계는 기존 정치권이나 언론계에서는 '상상력의 빈곤'(?)으로 시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녹색당과 타쯔에게서 이런 초창기의 전투성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최초의 전후세대는 독일의 현실에서 기성세대가 되어 버렸고, 68년 이후 근 40년에 걸친 훈육으로 두 개의 집단은 이미 불편해진 날카로운 송곳니를 버린 지 오래다.

이 68학생운동의 최대 합법적 산물은 그러나 지금 <신화를 쓰는 마라토너 요슈카 피셔>(이하 '마라토너')라는 한 인물의 전기를 통해 끈끈하게 자신의 연대성을 공개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타쯔 출신의 마티아스 가이스가 공저자 중의 한 명으로 참여한 이상 이 전기는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듯해 보인다. 더욱이 기자로서 피셔를 수년간 쫓아다닌 베른트 울리히가 또 다른 공저자라면, 그리고 책에서도 고백하듯이 공저자들 자신이 그의 유창한 화술에 압도되었다면 이 책이 피셔에 대한 일방적 찬양으로만 끝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무릇 모든 전기가 작가와 피사체와의 현상적 '간격 유지'라는 속임수를 통하여 독자와 피사체와의 '간격 좁히기'를 지향하고 있음을 간파하기만 하면 덩샤오핑을 아무리 냉혹한 실용주의 정치가로 몰아붙인다 하더라도, 스티브 잡스를 피도 눈물도 없는 야비한 기업인으로 비하한다하더라도 전기가 수미일관하게 자신의 지향에 충실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피셔에 대한 이 전기 공저자들의 '간격 유지' 맹세에 넘어가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면 독자들은 피셔에 대한 이해의 간격을 좁힐 수는 있을 것이다.

피셔, 그 고독하고 무자비한 마초

지금 독자들 앞에 선 사람은 독일의 학생운동을 상징했던 열정적인 루디 두취케나 유럽의 68운동을 상징하는 감각적인 다니엘 콩방디, 초기 녹색당의 상징이었던 매력적인 페트라 켈리, 그리고 요슈카 피셔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마녀'적인 근본주의자(Fundi) 유타 디트푸르트가 아닌 녹색당 현실주의자(Realo) 요슈카 피셔다.

독일 68운동의 전설적 인물들을 다 제치고 선 요슈카 피셔는 누구인가? 1985년 헤센주에서 처음으로 적녹연정을 실현하고, 녹색당 최초의 장관이 되었으며, 통일을 외면함으로써 연방의회 진출에 실패했던 서독의 녹색당을 동독의 동맹90(Buendnis 90)과 합당시켜 다시 연방의회에 진출시키고, 1998년 연방의회 선거의 승리로 녹색당을 집권 정당의 반열에 올려 놓으며 부수상인 외무부 장관에 취임했던 엄청난 기록의 소유자가 바로 피셔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피셔는 오늘날 독일의 가장 인기 있고, 가장 호감도가 높은 정치인이자 녹색당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에 대한 현상의 감각적 접근을 포기하고 시대적 접근을 한다면 피셔에 대한 관찰은 정치이념적으로도 매우 유의미한 접근이 될 것이다.

녹색당은 창당부터 다양한 사상적 배경을 가진 집단들의 정치적 잡탕이었다. 평화, 환경, 여성, 인권이라는 신사회운동의 4대 이념을 녹색당의 기본 원칙으로 수용했던 것은 녹색당이 신사회운동에 동조했다기 보다는 각각의 운동세력들이 당내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오히려 설득력 있다.

이러한 다양한 정치적 흐름이 합법적인 정당의 형태 속에 담기자 오직 하나의 이슈만으로 분출됐다. 즉 녹색당이 집권을 지향할 것인지 선명야당으로 남을 것인지. '마라토너'는 이 과정에서 피셔가 녹색당을 끊임없이 수권 정당화하기 위한 현실주의자(Fundi)의 대표적 기획가로서 근본주의자(Fundi)에 대해 '무자비한' 진압을 감행한 마초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피셔는 녹색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지만 그에게서는 특이하게도 '특정한' 녹색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녹색에 관심이 없는 녹색당 정치인, 환경에 관심이 없는 환경장관, "녹색당의 외교노선은 없고, 독일의 외교노선만 있다"고 주장하는 외무부 장관으로서 피셔는 녹색당이 철저하게 현실정치에 눈을 돌리도록 훈육했다.

'마라토너'는 피셔가 어떻게 녹색당을 '진압'했는지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녹색당과 그와의 '긴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시기적으로 적절히 묘사하는 데서 성공하고 있다.

85년 헤센주에서의 첫 적녹연정에서 사민당에 대한 양보, 통일 과정에서 동독시민사회그룹과의 합당, 98년 사민당과의 연방차원의 적녹연정,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참전 등 다양한 국내외 문제에서 피셔는 녹색당의 기본원칙에 대해 현실정치로 끊임없는 도발을 감행했다. '마라토너'의 표현처럼 그 과정에서 그는 일부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녹색당원들을 현실정치에 눈을 뜨게 만들었고, 더 나아가 녹색당에게 현실정치의 룰을 따르도록 했다.

근본주의자들은 피셔와 그의 무리들을 '피셔갱단'이라고 불렀고, 그 갱단은 녹색당을 천천히 그러나 때론 잔혹한 방식으로 점령했다. 오늘날 녹색당은 통일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기본적 정서를 외면하며 "모두가 독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날씨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이야기할 만큼 오만하지 않다(민족주의는 독일 좌파들에게는 거의 나치즘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독일인의 자부심이나 '위대한 독일통일'을 외치는 것이야말로 나치즘과 직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녹색당의 현실태, 피셔

피셔는 '오늘'의 녹색당 그 자체다. 그는 녹색당의 과거태도 아니며, 미래태도 아닌 현실태다. 현실태로의 녹색당이란 무엇인가? 녹색당은 환경세의 도입 및 다양한 환경산업의 발전, 에너지정책의 전환, 시민권법의 개정과 다문화사회의 발전 등 독일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환경 문제는 이미 기성 정당에서도 상당 부분 흡수되어 더 이상 환경은 녹색당만의 트레이드 마크로서 정체성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 또한 의회주의의 룰에 충실한 녹색당으로서 과거 신생 정당 시절처럼 과격한 구호나 이벤트만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유행처럼 다가왔다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져 가는) 앤서니 기든스가 즐겨 인용했던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노베르토 보삐오(Norbert Bobbio)는 <좌파와 우파>라는 저서에서 정치적 스펙트럼을 분석하면서 두 가지의 '삼자'에 대해 언급했다.

하나는 좌와 우의 중간에서 이들을 적당히 절충하여 종국에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포함된 삼자'이며, 다른 하나는 좌와 우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치색에 반영하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포함하는 삼자'다. 전후의 다양한 정치색을 언급한 그는 녹색당이 후자, 즉 '포함하는 삼자'에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매우 애매한 표현으로 즉답을 회피했다.

피셔가 길들인 현실태로서 녹색당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포함된 삼자'로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뚜렷한 자신만의 정체성과 대안을 상실한 녹색당은 심지어 자민당과 즐겨 비유되기도 한다.

보수주의의 자유주의에 대한 강제합병으로 신자유주의의 탄생을 목도하고, 사민주의의 자유주의와의 결혼으로 제3의 길을 수수방관함으로써 정작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 버린 자유주의처럼 오늘날의 녹색 이념은 좌우이념의 흡수와 합병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마라토너'의 저자들도 놓치지 않고 있듯이 이 녹색당의 정체성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피셔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의 녹색당에 대한 도전은 녹색당의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와 녹색당은 긴장 속에서도 뗄 수 없는 관계였지만 그의 눈에 띄는 신화적 성공은 녹색당의 보이지 않는 좌절을 의미했다. 그의 성공을 향한 마라톤은 녹색당의 몰락을 향한 하강으로 이어졌다. 피셔의 인기는 녹색당의 위축을 가져왔고, 집권의 달콤함에 대한 안주는 창조적 녹색정책생산에 독이 되었다.

'미완성'의 '달리기'?

원제 <미완성자: 요쉬카 피셔의 삶>(Der Unvollendete : das Leben des Joschka Fishcer)은 새벽에 남산을 조깅하는 피셔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연상을 자극하기 위하여 <신화를 쓰는 마라토너 요슈카 피셔>라는 조금은 얍삽하고 엉뚱한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002년 연방 차원의 1차 적녹연정이 총선을 앞두고 위기의 시간을 겪을 즈음 여전히 불완전하고 그리고 완성되지 않은 인물로서 피셔를 다루고자 했던 원저자들의 의도는 조깅하고 뛰는 '마라토너 피셔'라는 얄궂은 제목으로 인해 한국의 독자들에게 처음부터 내용적 접근을 방해받고 있다.

아니 '마라토너 피셔'라는 이미지를 '신화'와 결합 시키면서 이 책은 그나마 저자들이 미약하게나마 시도했던 피셔에 대한 질문과 도전을 한국 독자들에게는 포기하게 강요한다. 그저 '마라토너'라는 한국 제목이 강조하는 바는 이 책이 피셔라는 신화적 인물에 대한 찬양서이니 그 이상은 '접근금지!'이다.

하지만 '마라토너'는 (아마도 편집부의 소행으로 보이는) 무모한 제목과 일부 오타를 제외하면 훌륭한 번역서다. 그러나 가끔 심한 의역이 원문 충실성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마라토너'의 최근 출간은 사실 좀 의외이다. 우선 요즈음의 피셔는 '마라토너'에 나오는 것처럼 마르지도, 그의 네 번째 부인과 잘 살고 있지도 않다. 이미 과거의 뚱뚱한 몸매로 다섯 번째 결혼에 골인했다는 그가 아직도 뛰고 있는지 확실치는 않다. '마라토너'의 피셔는 이미 지금의 피셔가 아니다. 원저자들의 의도처럼 물론 그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자'이니 변화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것이 설혹 그의 몸매에 관한 것이라도.

'마라토너'의 최근 출간이 의외인 진짜 이유는 이 책이 피셔와 그가 속한 녹색당이 직면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포스트 모던'과 신사회운동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는 '작은 이야기'나 탈물질적 가치가 전혀 새로운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느 정도의 실업을 관용할 수 있었던 때에 생태, 환경, 평화 등의 문제는 아직까지는 여유로운 사람들의 집권정당의 프로그램으로 용인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업률 12%와 새로운 유형의 양극화 등 포스트 모던의 독일사회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사실상 이 문제에 대한 명백한 가치와 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생태와 환경의 허리끈을 질끈 묶어야 한다는 기존 녹색당의 주장은 배고픈 대중의 지나친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탈물질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선 상황에서 현실의 녹색당은 아직 창조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기민련과 사민당의 대연정, 그리고 녹색당의 좌절에 대해 집권을 향해 달려왔던 피셔는 아직 집권하지 않는 녹색당의 미래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 역정은 녹색당의 집권이었지 집권하지 않는 녹색당이 아니었기에…….

신화를 쓰는 마라토너 요슈카 피셔

마티아스 가이스.베른트 울리히 지음, 정계화 옮김, 궁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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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간 반부패운동에 몸담아 왔다. 또한 10년간 가족들과 함께 홈스쿨과 대안교육활동을 했다. 편역/편저로는 반부패지도 I, II, III이 있으며, 저서로는 "다리미를 든 대통령-부패 없는 사회를 위하여"(민들레)가 있다. 현재 캐나다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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