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포근하다. 아니다, 눈은 차다. 눈은 그렇게, 볼 때와 손에 만졌을 때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 그러나 눈은 포근하다는 볼 때의 느낌이 차다는 만졌을 때의 느낌을 압도한다. 우리는 뻔히 알면서도 눈의 그 차디찬 느낌을 나 몰라라 한다. 우리가 시린 손을 호호 불면서도 눈밭에서 마냥 즐거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냉기가 5분 이상 장갑을 벗고 있기 힘들게 했지만 세상을 덮은 눈밭을 지날 때 나의 마음은 푸근하기만 했다.
겨울 나무는 앙상해 보인다. 바람이 숭숭 통하는 그 앙상함 때문에 겨울나무는 우리 눈에 안쓰럽게만 보인다. 오늘 눈이 나무의 몸을 반쯤 덮어주고 있다. 안쓰러움이 반쯤 가린 느낌이었다.
사실 겨울은 대지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는 계절이다. 겨울산도 속살이 다 들여다보이는 느낌이다. 그 점에서 보면 대지는 가난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더운 계절엔 겹겹의 초록잎을 두텁게 두르고 살다가 하필 겨울이 왔을 때는 맨살로 오들오들 떨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그 대지의 가난을 눈이 포근하고 하얗게 덮어주었다.
드디어 치악산 정상에 올랐다. 과연 누구였을까, 치악산의 정상에 저 돌탑을 쌓은 사람은. 치악산 정상에서 돌은 겹겹이 쌓여 더 높이 올라가려 한다. 눈은 그와 반대로 한켜 두켜 쌓여 세상을 덮으려 한다. 돌탑은 그렇게 머리를 하늘로 두고 있었고, 눈은 가슴을 대지로 두고 있었다. 눈의 느낌이 따뜻한 것은 그 때문이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따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치악의 정상에 오르고 나도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모두가 선 정상에 눈이 있었다. 우리들이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고, 정상의 돌탑이 하늘을 향하여 더 높이 몸을 세울 때 눈은 반대로 그곳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우리에겐 정상이 가장 높은 곳이나 눈에겐 우리가 출발했던 저 아래쪽, 그곳에서도 가장 비루하고 가난하며 낮은 곳이 가장 높은 곳이다.
나는 눈의 길을 거슬러 정상에 오르고, 그 다음엔 눈의 길을 따라 내가 출발했던 저 아래쪽으로 동행을 계속했다. 눈이 외나무 다리를 삐뚤삐뚤 건너가며 이렇게 말한다. 균형을 잘 잡아. 장난기 어린 그 걸음을 따라 팔을 벌리고 외나무 다리를 건너듯 꼬불꼬불 산길을 내려갔다.
바람이 흔들자 나뭇가지에 얹혀있던 눈들이 내 머리 위로 우수수 날렸다. 눈이 날릴 때 숲엔 나밖에 없었다. 눈이 올 때면 세상 모두의 눈이지만 눈 온 날 숲에 가면 나 혼자 독차지하는 눈도 있다.
처음 산을 오를 때 눈은 나무의 앙상함을 가려준 포근함이었는데 이제는 나무가 눈이 지상으로 오는 길이었다. 나무의 길 안내를 따라 그렇게 눈은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에선 눈이 양쪽으로 팔을 들어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으쌰, 으쌰, 운동을 하고 있었다. 가던 길에 잠시 뻐근해진 몸을 풀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따라 팔을 들고 잠시 몸을 풀었다.
눈밭에 누군가 남긴 발자국이 있었다. 나뭇잎이 잠시 발자국의 흔적을 기웃거렸다. 지난 가을, 저를 유난히 오랫동안 올려본 사람의 체취라도 남아있는 것일까. 눈밭에선 그렇게 모두 자기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곧 사라지겠지만 그러나 눈이 오면 우리는 그 사실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다. 흔적도 없이, 아무 자취도 없이 그렇게 사라지는 사람이란 이 세상에 없다. 눈과의 동행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얻어 들은 눈의 전언이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