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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칭기즈칸>에서 칭기즈칸이 백성들에게 호라즘 원정을 선포하고 있다.
ⓒ kbs
스티븐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의 허무함을 다룬 영화라고 생각한다. ‘라이언’이라는 병사 한 명을 구하기 위해서 8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건 분명 상식 밖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라이언이라는 병사는 휴머니즘을 상징하고, 그걸 지키기 위한 희생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한 명을 위해 8명이 죽었다는 그 사실에 무게를 두어 전쟁의 비합리성을 외친 영화라고 이해했다. 나의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듯 영화에서도 어떤 병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왜 이름도 모르는 그 한 명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희생해야 하는가?”

어떤 전쟁을 막론하고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에 동참해야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기가 어렵다. 라이언 병사를 구하러 전장에 뛰어든 그 8명의 병사들처럼 자기와는 무관한 일에 아까운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전쟁 영화인 <태극기 휘날리며>도 전쟁의 무의미함을 표현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했다.

KBS 드라마 <칭기즈칸>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어서 영화얘기부터 꺼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전쟁의 무 목적성을 보여준 영화라면 <칭기즈칸>은 전쟁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느끼게 하는 드라마였다. 정말 색다른 전쟁 관련 드라마다. 드라마에서든 영화에서든 여러 전투 장면을 봤지만 <칭기즈칸>에서처럼 전쟁을 하는 이유가 분명한 드라마도 없었다.

칭기즈칸이 지휘하는 몽골의 군사들은 전쟁을 사냥처럼 인식했다. 노루 사냥을 나갔을 때 하루 종일 노루를 쫓아다니면서 온 힘을 다해 애쓰면 분명 얻는 게 있다. 굶주린 배를 채울 수가 있는 것이다.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에서 몽골의 군대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것은, 거대한 제국 금나라나 호라즘을 통치하고, 거기서 권력을 누리는 게 아니라 오직 약탈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의 관심은 예쁜 여자를 빼앗아오고, 비단 보석 등 귀중한 물건을 약탈했다. 그래서 전투장면 다음에는 시가지를 휩쓸고 다니며 여자를 끌고 가고, 약탈물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병사들을 보여주는 장면이 관례처럼 이어진다.

한때는 헌 옷가지를 빼앗기 위해 약탈을 일삼던 몽골의 백성들은 이후 금나라를 공격하고 호라즘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비단 옷을 걸치고 다니고, 몽골의 아가씨들은 금나라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장신구에 좋은 향수를 뿌리고 다닐 정도가 됐다.

다른 나라를 공격할 때마다 나날이 부유해지는 걸 백성들 스스로가 느끼게 되므로 전쟁의 필요성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한 번 전쟁에서 돌아오면 더 잘 살게 되므로 전쟁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칭기즈칸이 초원을 통일하기 이전 초원에는 강한 부족과 약한 부족이 난립했었다 절대적으로 물자가 부족했던 이들은 강한 부족이 약한 부족을 침략해서 여자와 옷가지, 양 등의 물자를 얻었다.

칭기즈칸의 어머니 커어룬 또한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다른 부족에게서 약탈해온 여자고, 그의 아내 버얼테는 한때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당한 적이 있으므로 약탈이야말로 생존의 한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 또한 지금까지 그들이 살아온 방식의 일환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해서 물건을 빼앗아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고, 그래서 리더인 칭기즈칸이 전쟁을 하자고 선포하면 기꺼이 전쟁에 동참했다.

칭기즈칸의 군대가 전쟁에서 번번이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병사들이 싸워야하는 목적의식을 분명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목적의식이야말로 그 어떤 전략 보다 앞선 전략이었던 것이다.

드라마 <칭기즈칸>을 KBS에서 방영한다고 했을 때 한때 우리나라를 침략한 적이 있는 오랑캐에 관한 드라마를 그것도 왜 공영 방송에서 하느냐는 여론이 있었다. 이에 방송국에서는 기획의도를 통해 우리나라 삼성에서도 칭기즈칸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고, 미국의 거대 기업가 잭웰치는 칭기즈칸 진정한 팬이라는 말로 답변했었다.

유라시아를 피로 물들였던 정복자라는 이미지를 벗고 배울 점이 많은, 연구대상으로 떠오른 칭기즈칸, 그에게서 우리 사회가 과연 배울 점은 무엇일까?

▲ 리더로서는 탁월했던 칭기즈칸.
ⓒ kbs
심복 중 한 명은 칭기즈칸이 전쟁에서 싸우다가 가슴에 화살을 맞았을 때 칭기즈칸의 피를 입으로 다 빨아들이고, 더러운 피를 꿀꺽 삼켰었다. 누군가 흘린 피를 보고 칭기즈칸을 모해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행동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는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었다. 또 이 심복은 밤중에 깨어난 칭기즈칸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목말라하자 마이주를 구하러 적지에까지 잠입하는 등 칭기즈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칭기즈칸이 이렇게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부하의 충성심에 따라서 계급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부자라고 귀족이라고, 칸의 자식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프리미엄을 누릴 수는 없었다. 칭기즈칸에게 충성심을 보인 사람이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다. 만호장을 선출할 때 그의 아들은 8천호장으로 임명했는데, 그의 심복들을 만호장으로 선출한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충성심은 곧 전쟁에서의 성과로 나타났다. 비록 미천한 노비였다 하더라도 업적을 쌓으면 승진할 수가 있었다. 금나라서 만난 노비가 전쟁에서 적장의 깃대를 빼앗아오자 그전에 지은 죄를 면하게 했고, 나중에는 상인 대표로 호라즘을 방문하는 중책까지 맡겼다.

몽골 군대의 조직 구성원들은 처음부터 한계를 갖지 않았다. 탁월한 활솜씨를 갖고 있다거나 용맹을 발휘해 적장의 깃대를 뺏어온다거나 해서 조직에 공로가 있으면 승진이 가능했던 것이다. 즉 칭기즈칸의 군대는 열린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 또한 칭기즈칸의 군대가 나날이 성장하는데 일조했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에 이런 열린사회가 존재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계급 간에도 장벽이 없었지만 종교적으로도 자유가 보장됐다. 칭기즈칸은 장생신에 대한 믿음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원정을 나가기 전에서 3일 밤낮을 장생신에게 기도를 드린 후 나름의 응답을 받고 나갈 만큼 믿음이 확고했다. 그렇지만 그는 타인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어떤 종교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그래서 호라즘을 공격했을 때 무슬림 지도자들이 자발적으로 칭기즈칸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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