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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권진원은 이렇게 노래했다. "살다 보면~ 하루하루 힘든 일이~ 너무도 많아."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살다 보면 괜시리 서글픈 날 너무도 많"지만, "오늘도 맘껏 행복했으면, 그랬으면 좋겠네"라고 바라지 않겠는가. 성적 소수자라고 다르겠는가. 성적 소수자도 "행복했으면"이라는 바람으로 살지만, 성적 소수자로 '살다 보면' "괜시리 서글픈"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2005년의 늦가을 혹은 초겨울, 그들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도 그렇게 시작됐다. 그들의 일주일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 재구성했다.
일요일, 극장에서 비웃음을 사다
서른다섯 살의 노총각, 윤도형씨는 홀어머니에게 미안했다. 동성애자여서 결혼을 하지 못하는 죄.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씀드리지 못하는 죄. 주말이면 이태원 밤나들이에 여념이 없는 아들은, 모처럼 일요일 오후 어머니께 효도하기로 작심했다. '그래, 엄마랑 영화를 보는 거야.' 어머니는 '괜찮다'고 마다하다가, 설레는 얼굴로 따라나섰다.
그들의 선택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시작은 좋았다. 일곱 커플의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가 관객을 울리고 웃겼다. 그도 발랄한 이혼녀와 숙맥 총각의 좌충우돌 연애담에 웃고, 가난한 젊은 부부의 서글픈 사랑 이야기에 울었다. 어머니도 즐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요일'은 짧게 끝나버렸다. 영화 중반에 드러난, 이혼남과 남자 도우미의 '동성애'가 그와 관객 사이를 갈라놓았다. 영화에 순연하게 몰입하던 관객은 남성 커플이 나올 때마다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 도우미가 중년의 이혼남의 넥타이를 바로잡아 줄 때 '어?' 했다가, 이혼남이 청년에게 선물을 건네자 "허걱!" 하다가, 이혼남이 떠나려는 청년을 붙잡자 "에이 씨!"라고 짜증을 냈다.
그는 짜증내는 관객의 반응이 짜증스러웠다. 그것은 극장의 어둠 속에서 드러난 적나라한 동성애혐오증이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한국의 동성애 인권지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관객의 비웃음을 자신의 코웃음으로 받아쳤다. '여러분의 아름다운 이성애에 혐오스러운 동성애가 끼어들어서 죄송함다~.' 그래도 솔직히 서글펐다. 그는 그들의 사랑에 가슴 아프고, 좋아하는 배우 천호진이 동성애자 역할을 한다는 것에 마음이 설레었지만, 남들처럼 편하게 울지도 못했다. 그의 옆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하긴, 처음도 아니었다. 1년 전 가을, 한국 영화 <주홍글씨>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홍글씨>에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갈등하던 부인과 애인이 알고 보니 대학 시절 연인이었다는 레즈비언의 반전이 들어 있었다. 관객이 어찌나 개탄해 마지않던지, 그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첼로를 연주하던 두 여성이 서로 애무하는 에로틱한 장면에서도 여성 관객은 "어머!", 남성은 "참!"이라고 추임새를 잊지 않았다.
'쳇, 아직도 동성애자에게는 주홍글씨가 찍혀 있다는 확인 사살이군.'
극장을 나서며 그는 씁쓸했다.
월요일, 경찰이 협박하다
서른 살의 '잘나가는' 남성 동성애자 김아무개씨, 그는 지방 출장 중이었다. 한참 일을 보고 있는데, 휴대 전화에 낯선 번호가 찍혔다.
"이 번호 주인이시죠?"
"네, 그런데요."
"여기 ××경찰서인데요. 한번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예?"
"××마사지에 가신 적이 있으시죠?"
"무슨 말씀이세요?"
"왜 이러세요. 고객 명단에 나와 있는데…."
"지금 바쁘거든요.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당황스러웠다. '××마사지', 몇 달 전 인터넷에서 발견한 마사지 업소였다. 그 지방에 가면 한번 들러볼까, 인터넷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더랬다. 주인인 듯한 사람이 전화를 받았고, 찾아가는 방법을 물어보고 끊었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다.
'이런, 그때 주인이 장부에 내 번호를 적어두었나 보군.'
경찰에 전화를 했다. 경찰은 그 업소가 남성동성애자를 상대로 성매매를 하다가 적발됐고, 압수한 명단에 그의 전호번호가 적혀 있다고 했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오히려 경찰은 협박조로 말했다.
"이거 왜 이러세요. 다 알고 있습니다. 빨리 와서 조사 받으세요."
졸지에 성매매특별법 위반으로 입건될 처지였다. 혹시 경찰이 회사로 전화라도 한다면? 설마 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아… 어쩌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핀잔부터 줬다.
"그러니까 그런 데는 왜 다니고 그래."
친구는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경찰이 압수한 고객 명단에 오른 사람이 수백 명이라고 했다. 일일이 불러서 조사하고 있다고 했다. 조사 과정에서 피의자가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 당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무심한' 경찰이 피의자를 추궁하는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주변 사람들이 피의자의 '신분'을 모두 알게 된 모양이었다. 더욱 두려웠다. 친구는 일단 기다리라고 했다. 경찰 조사 과정의 인권 침해를 문제삼을 작정이라고 했다.
"야, 그런데 안 가면, 경찰이 집으로 출두 명령서를 보내지 않을까?"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으로 경찰이 보낸 통지서라도 날아 온다면?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경찰에 갈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화요일과 수요일, 하느님이 너희를 심판하리라
그것은 테러였다. 대자보는 찢기고, 무지개 깃발은 사라졌다. 한국여대 레즈비언 모임은 레즈비언 문화제를 열었다. 공들여 전시물을 만들고, 대자보를 붙였다. 테러는 미국에 반대하는 이슬람근본주의자가 아닌, 동성애를 혐오하는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보였다.
테러의 위험은 문화제 첫날부터 느껴졌다. 한국여대 기독교단체는 자신의 선전물로 레즈비언 문화제를 포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레즈비언 모임의 새내기 이소연씨는 더욱 충격이 컸다.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 교회 친구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화가 났지만, 나서기 어려웠다. 아우팅의 위험 탓이었다. 레즈비언 문화제를 지지하는 이성애자들이 행사 방해에 항의하자 그들은 "당신도 레즈비언이냐?"라고 추궁했다.
화요일 저녁, 밤새워 대자보를 지켰다. 지난해 문화제 때도 홍보물이 훼손당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벽녘, 회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미 대자보가 찢겨져 있었다. 이소연씨는 무서웠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가!'
다음날, 기독교 단체의 기세는 대단했다. 성경에서 도덕성을 강조한 문구를 모아서 행사 주변에 붙였다. 이소연씨에게는 경고문으로 읽혔다. "동성애는 죄이며, 하나님이 동성애자를 심판하리라"라고 말하려는. 참, 그는 학교의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사라진 무지개 깃발을 발견했다.
목요일, 선생님이 고자질하다
선애와 미주는 '커플'이다. 둘은 고1 때, 친구들의 '소개'로 알게 됐다. 선애의 짧은 머리와 씩씩한 행동은 쉽게 눈에 띄었다.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농담으로 "야, 옆 반에도 너랑 비슷한 애 있어"라고 말했다. 선애도 알고 있었다. 옆 반의 미주는 '중학교 때 같은 반 여자애와 사귀었다'는 소문이 따라다니는 아이였다.
어느 날 하교 길에서 선애는 미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둘은 빠르게 친해졌고, 어느새 사귀게 됐다. 선애와 미주가 붙어다니자 아이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가끔씩 그들의 등 뒤에서 "쟤들 레즈라며"라는 '뒷담화'도 들려왔다.
마침내 들키고 말았다. 둘이 사귄다는 소문은 담임교사의 귀에 들어갔다. 담임은 교무실로 선애를 불렀다.
"야, 너 머리가 왜 이렇게 짧아? 네가 남자야?"
담임은 호통부터 쳤다.
"너 이상한 소문 들리더라. 미준가, 너 정말 그 애랑 사귀어?"
담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주변의 교사들도 선애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봤다. 선애는 더욱 대답하기 싫어졌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야. 당분간 미주 만나지 마라. 알았지?"
선애가 계속 침묵을 지키자 담임의 말투는 시비조로 변해 갔다.
"너, 자꾸 이러면 부모님 부른다."
그래도 선애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날 저녁, 담임은 기어이 선애의 집에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선애는 어머니의 추궁을 받으며 친구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인터넷 모임에서 만난 또래 레즈비언 중에는 자퇴한 아이들이 꽤 많았다. "자의 반, 타의 반." 아이들은 자퇴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 담임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자기 식대로 나를 선도하려고 부모님께 알린 거지. 그런데 학교에서 수군거리지, 집에서 감시당하지,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
선애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금요일, 상담자, 소개팅을 부탁받다
이십대 중반의 유씨는 금요일마다 남성 동성애자 단체에서 상담 전화 받는 활동을 한다. 오늘도 그는 전화벨이 울리면, 혹시 그분일까 싶어 약간은 두렵다. 그에게는 금요일마다 전화하는 단골상담자가 있다. 예순이 넘은 동성애자다. 벌써 예닐곱 번은 통화했다. 그는 평생을 '기혼 게이'로 살아왔단다. 평생을 '참아온' 그는 막내가 결혼하자 이혼했다고 한다. 이제라도 동성애자로 살기 위해서.
서울로 혼자 올라와 경비 일을 하면서 산다고 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인생을 찾고 싶다고,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제발 사람 좀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유씨는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라고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매정하게 끊지 못하는 전화 통화가 금요일마다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통화가 길어지자 "전화 받는 사람 목소리가 좋다"면서 유씨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전화벨은 울렸다. 유씨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의 오늘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유씨에게는 또 다른 단골 상담자도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집 밖으로 나가기 힘든 중증장애인이다.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할 수도 없는 그로서는 다른 동성애자를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는 유씨에게 "내게 음란전화라도 해 달라"고 매달렸다. 유씨는 평생 그토록 절박한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정작 도움을 줄 방법이 거의 없다. 도움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동성애자들은 나이가 많거나 지방에 살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그들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그들은 게이 커뮤니티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혹은 못 나온다). 만나지 못하니 돕지도 못한다. 정작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저 멀리 벽장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유씨는 그것을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토요일, 그래도 밤 마실은 계속된다
다시 일요일의 윤도형씨 이야기다. 그는 이태원의 노련한 '밤구두'다. 주말이면 '무대 의상'을 차려입고, 이태원의 게이 바로 '밤 마실'을 나간다. 또래의 이성애자 친구들이 방바닥을 긁고 있을 주말에, 그에게는 설레는 마음으로 갈 수 있는 놀이터가 있는 셈이다(물론 한국에서는 서울에 사는 중산층 게이들만의 얘기일 수 있지만).
그리고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세상이 있고, 느낄 수 있는 연민이 있으며, 공감할 수 있는 아픔이 있다는 것에 이제는 때때로 감사한다. 그는 죽고 싶었던 사춘기와 위태로웠던 청년기를 어렵사리 통과하는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렀지만, 이제는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한 이성애자로 태어나지(살아오지) 않았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감사한다.
그리고 그는 더는 비련의 주인공이기도 싫다. 이미 그것은 30여 년을 살면서 죽도록 해본 역할이다. 그는 그 생애의 마지막 일주일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동성애자 청소년들이 자살의 유혹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세상 말이다. 그래서 이성애자들이 깝죽거리면 뒷담화라도 '까줄' 생각이고, 사회가 업신여기면 천 배 만 배로 앙갚음해 줄 각오다.
미안하지만, 비로소 그는 가끔 게이인 것이 정말 '게이(gay:즐거운, 명랑한)'하다. 심지어 그는 윤회가 있다면, 다시 동성애자로 태어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영화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마지막에는 니체의 경구가 뜬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