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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 출판사 작가마을(대표 배재경)에서 야심찬 기획으로 시집을 출간하고 있다.

'작가마을 시인선'이 그것이다. 서울 중심의 이름 있는 작가를 좇을 게 아니라 지역에 묻혀 올곧은 삶을 바탕으로 시인의 본분을 다하는 이를 찾아 시집을 펴내겠다는 것이 이들 기획의 중심 내용이다. 그리 좋지 못한 출판 시장의 여건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문학정신을 펼쳐가는 이 작은 출판사에 나는 박수를 보내고 또 보낸다. 이는 상업주의에 허덕이는 우리 문학동네의 벽에다 격문을 쓰는 경우이다.

작가마을 시인선2는 영천의 농민시인 이중기의 시집 <다시 격문을 쓴다>이다. 1957년 경북 영천에 태어나 지금도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이중기 시인. 그는 1992년 시집 <식민지 농민>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숨어서 피는 꽃> <밥상 위의 안부> 등의 시집을 이미 상재했고, 이번에 펴낸 시집 <다시 격문을 쓴다>는 그의 네 번째 시집에 해당한다.

▲ 이중기-다시 격문을 쓴다
ⓒ 작가마을
나는 논과 밭을 경전으로 삼았다
물소리 바람소리 다 말라버린 가뭄을 건너
슬픈 남루를 액자에 담아 거는 극지의 노을까지
농사짓는 일이 명부전 같다
나는 그것이 분하다
탁란을 마친 뻐꾸기는 어딜 갔는가
파란만장한 책, 아, 사무치면 고요에 닿는가
나는 이제 나의 경전을 얼음 감옥에 가두어야겠다
神에게 들키지 않을 꽃 한 송이 불끈 피우겠다


시집의 서문 격인 <다시 격문을 쓴다> 맨 앞머리에 놓여있는 '나의 경전'이라는 시다. 위 시에는 평생을 "논과 밭을 경전 삼"아 온 농민 시인 이중기의 작금의 농업에 대한 비정한 심사가 처절하게 녹아들어 있다.

농사짓는 일을 '슬픈 남루'와 '명부전' 같다는 언사(言詞)에 텔레비전 화면 속에 격렬하게 투쟁하던 농민 시위대의 모습이 환시로 떠오른다. 자기 몸의 피와 살과 같은 쌀을 길바닥에 내던지며 기름 얹어 불지르는 우리 시대 농민들의 처절한 분노가 일렁거린다. 이처럼 파탄 직전의 농업에 대한 정부의 농업 정책을 시인은 소쩍새의 붉은 피울음을 찍어 '격문'을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 생존의 마지막 근본 바탕인 농업을 지켜내려는 시인의 간절한 바람은 그의 시집 전편에 일관되게 녹아있다.

"<농사> 흉년이면 농민들 살림이야 어렵겠지만/<농업>이 무너지면 나라가 고생입니다", "아버지는 잘못된 역사 발전에 백의종군하느라/궁상 한 번 없이 죽어라 땅만 파던 땅강아지였다/나달나달해진 경전, 내게 논밭을 물려주신/아버지 무덤에 1인 시위하러 간다"라고 시인은 목놓아 울고 있다.

"발동 꺼져버린 초록공장에 억새 우거"진 "밥상머리 질서가 무너진 절벽의 시대"에 "0나는 시의 몽리 면적을 쓸데없이 넓혀왔"다고 시인의 자기 처지를 스스로 질타하고 있다.

쌀 시장 개방이라는 거대한 공룡이 지금 우리 농민들 앞에 턱하니 버티고 있다. 세계 시장 경제 질서에 대해서 필자는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의 먹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뼈가 부서지게 고생하는, '생의 극지'에 서 있는 농민들의 눈에 분노와 절망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농민 시인 이중기가 피눈물을 찍어 또 '격문'을 다시 쓰는 걸 나는 원치 않는다.

다시 격문을 쓴다

이중기 지음, 작가마을(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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