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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양극화는 노동뿐만이 아니라 주거와 교육 등에도 뿌리를 내리며 공동체를 갉아먹고 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와 함께 '양극화를 넘어'라는 기획 기사를 연재한다. 양극화해소연대는 지난해 9월 전국 136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구성한 사회·경제 개혁 추진을 위한 연대기구다. 이 글은 기획 첫 번째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인 변창기씨가 털어놓은 자기 이야기다. <편집자주>
지난해 현대차 울산공장을 맨발로 한 바퀴 돈 뒤 대덕사 천막농성장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변창기씨.
지난해 현대차 울산공장을 맨발로 한 바퀴 돈 뒤 대덕사 천막농성장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변창기씨.

그러고 보니 벌써 6년이 지났구나. 세월 참 빠르게 흐른다.

지난 2000년 7월 3일 직장을 찾던 내가 우연히 만난 업체 소장을 따라가 직장을 찾은 게 지금의 일터다. 처음에 난 처자식과 함께 먹고 사는 게 다급한 문제여서 무조건 아무 곳이나 뚫고 들어가 일을 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하청업체 소장은 7월 3일 오전 7시경 정문 앞에서 보자고 했다. 난 서류를 준비해서 시간에 맞춰 나갔다. 하청 소장은 반가워하며 출입 절차를 밟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쇠뭉치, 기계뭉치... 난 생소했다

처음 보는 내 일터, 서먹하고 생소했다. 속으론 좀 두려운 면도 있었지만 원청 관리자의 물음에 난 "네! 잘 할 수 있습니다"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정규직이 작업하던 일자리에 하청으로 내가 처음 투입된다고 했다. 난 정규직에게 일주일 정도 일을 배웠다. 처음이라 그런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속도도 엄청 빨랐다. 지금은 라인 위로 제품이 1시간 18~22개 정도 나오지만 그 땐 시간당 28~30개씩 나왔다. 내가 맡은 일은 페인트칠해 나오는 생산 제품을 14~11개들이 적재 공간에 적재해서 보내는 일이었다. 호이스트라는 기계로 물건을 들어올려 적재했는데 라인 도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게다가 비닐도 씌워야 하고 딱지도 붙여야 하고 제품번호도 써야 하니 똥오줌도 못가릴 정도로 힘들었다. 하루 작업 끝나면 장갑은 기름과 페인트 투성이었다. 손에선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처음엔 직장이라고 좋아했더니 그게 아닌 것 같은 일들이 자꾸만 내 정신을 교란시켰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다.

① 내가 들어오기 전에 정규직이 일하던 자리였는데 왜 갑자기 하청으로 바뀌었지?
② 내 시급 2100원(2000년 입사 당시), 왜 정규직과 차이가 이렇게도 심하지?
③ 왜 같이 일하는데 후생복지가 정규직-하청 간 차이가 많지?
④ 왜 하청은 상여금이 600%지? 정규직은 700%인데….
⑤ 왜 하청은 수당이 하나도 없지? 정규직은 10여 가지가 넘던데….
⑥ 왜 하청은 2시급(연장근로, 휴일근로 때 적용되는 시급)이 없지? 정규직은 2시급이 있던데…
⑦ 왜 하청은 사내 병원을 이용할 수가 없지?
⑧ 왜 정규직이랑 출입증이 다르게 생겼지?
⑨ 왜 정규직과 하청의 야간할증 적용이 다르지?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간차별성 차이에 대해 생각이 떠올랐다. 우연히 정규직 급여 봉투를 한번 본 일이 있는데 난 눈알 튀어나올 뻔 했다. 와~ 뭔 놈의 수당이 이리도 많냐? 가족수당, 후생복지수당, 뭔 수당, 뭔 수당 … 수없이 많았다.

야간 수당도 원청과 하청이 달랐다. 14.5시간은 같은데 하청은 6.5시간이 야간할증 시간이었고 원청은 13.5시간이 야간할증 시간이었다. 정규직은 아프거나 다치면 자유로이 사내병원을 다녔는데 하청은 예외였다.

7월에 입사 후 첫 추석을 맞았을 때도 화딱지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정규직은 귀향비니 선물이니 보너스니 하면서 한아름씩 받아가는데 하청노동자는 비누 쪼가리 선물 하나 달랑이었다. 얼마나 서운하고 열 받던지….

1년 후 안전사고 발생... 공상 처리?

변창기씨.
변창기씨.
어느덧 참고 견디며 흐른 1년 후 나는 허리가 아파 일하다 말고 주저앉아 못 일어나는 일이 발생했다. 생산품을 2단·3단 적재하기 위해서는 평균 10㎏이 넘는 앵글을 들어올려 단을 쌓아야 한다. 어떤 앵글은 양 옆에 꽉 끼어 잘 빠지지 않는 게 있었는지 그것을 강제로 들다가 그만 허리가 삐끗한 것이었다. 난 허리통증 때문에 아프고 고통스러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하청업자 차량으로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 있는 현대차 사내병원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아니, 왜 사내병원을 안 가고 어디 가는겁니까?" 업체소장은 사내병원을 사용할 권한이 없다면서 밖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참, 별 희안한 원하청 관계 다 보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 일로 난 일주일 정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빨리 낫게 하기 위해 억지로 일어나 매일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3일치 약을 지었는데 4일째 되는 날 다시 처방전 받아 약국에 가서 내밀며 "약 짓는데 얼마냐"고 물었다가 숨 넘어갈 뻔 했다.

1500원이면 될 약값이 9500원으로 치솟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공상처리된 처방전에 대해서는 의료혜택이 꽝이란다. 그래서 난 약을 먹을 수가 없었다. 지을 돈이 있어야 지어먹던가 하지. 다행히 병원 치료는 하청업체에서 대신 내주어 하루에 한 번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처음에 하청소장은 한 2주 정도 푹 쉬라 했다. 그런데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일요일 밤 전화가 왔다. 하청 소장이었다. 일할 사람이 없어 그러니 월요일부터 출근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아직 아픈 기가 남았지만, 난 하청 소장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한동안 나는 아픈 몸으로 일했다. 그리고 시간 나는대로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근골격계라는 직업병의 일종이었다. 같은 작업을 반복할 때 생기는 허리, 어깨, 목, 무릎, 발목 등에 나타나는 골병 현상이었다. 하청업체 입사해서 지금까지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 언제 또 어디가 골병들지 알 수가 없다.

하청업체 다니면서 이상하게 생각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해마다 정규직은 임금이 오르는데 하청은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도 궁금해 하청업자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대답이 한결같았다. "원청에서 올려주지 않아 올려줄 게 없다"는 것이다. 나 참, 뭐 이런 기업이 다 있지? 업체 사장이면 자기가 알아서 올려주면 되는거지, 원청 사측을 왜 들먹거려?

그때 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날 소장이 와서 그런다. 나보고 내일부터 다른 업체로 넘어갈 거라고. 그 때 또한 번 황당했다. 뭐야 이거? 현대차 사내하청업체는 인간장사? 자기들 맘대로 논밭 정리하듯이 하네? 난 하루 아침에 ○○기업에서 ○○(주)라는 업체로 하청업자가 변경되었다.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하자. 어차피 내 서류 일체가 다 그대로 넘어간다니 바뀌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물어보니 원청에서 그렇게 하란다고 했다. 난 그 때부터 "아하, 현대차 사내 하청업자는 사람 찾아 투입시키고, 내가 일해서 번 돈 일부를 떼먹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1인시위를 끝낼 것 같은가?

나는 2004년 12월 7일부터 시간나는대로 내 몸 상태가 좋으면 계속 1인시위를 해왔다. 노동부, 경찰서 앞, 법원 앞, 사람 많은 중심가 등을 두루 서보기도 하고, 시내에서 현대자동차 정문까지 걷기 투쟁도 하고 자동차공장을 한 바퀴 도는 투쟁도 여러 번 해보고 맨발로 돌아보기도 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도 우산 들고 울산공장을 한 바퀴 돌기도 했다.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임단투가 끝나고도 나는 계속 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본관 옆에서 아침 출근투쟁을 하고 있는데 경비가 오더니 "이제부터 회사 내에서 1인시위 못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나는 그래도 계속 서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럼 강제로 못하게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누가 지시한 거냐고 물었지만 경비는 "그런 거 알 거 없다"며 대답을 회피했다.

나는 폭력사태가 또 일어날 것만 같아서 1인시위 한 지 10여분 만에 현수막을 접어넣고 일터로 가버렸다. 나는 업무방해도 하지 않았고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고 작업거부도 한 적이 없다. 나는 출근시간, 점심시간, 퇴근시간을 활용해서 '불법파견 정규직화'에 대한 내 의견을 주장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법으로도 가로막지 않는 1인시위를 현대차 자본이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도 폭력의 두려움을 앞세운 무력으로, 강제로 말이다. 이 얼마나 천박한 노동탄압인가!

민주노조, 강성노조라는 현자노조가 시퍼렇게 살아있음에도 나는 자본의 폭력이 겁나서 1인 시위를 공장 안에서 못하고 있다. 나는 공장 안에서 1인시위를 해도 경비들이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겠다는 확답이 없는 한 공장 안에서 1인시위를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1인시위를 끝낼 것 같은가? 나는 밖에서 계속할 것이다. 불법파견 정규직화가 실시될 때까지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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