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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대에게 김광석은 왜 잊혀지지 않는 걸까? 김광석의 노래를 들었을 때 밀려오는 절박감은 무엇일까? 김광석과 같은 세대로 같은 시대를 살며, 그 자신 대학 시절 노래동아리 활동을 한 대중문화평론가 신현준씨의 기고를 통해 그 답에 접근해본다.

* 잠시 볼륨을 올려주세요. 기사를 읽을 때 김광석의 노래가 나옵니다. <편집자주>


ⓒ 위드 33 뮤직

생전에 그리 가깝지도 않았고 그리 멀지도 않았던 사람에 대해서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김광석이라는 이름이 지금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일반적인, 아주 일반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지나가 버린 기억들, 예를 들어 '통기타' '교정' '소극장' '교외선' 등의 단어를 던지고선 추억과 상념에 잠기는 것은 그를 기억하는 가장 나쁜 방식일 것 같다. 적어도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안된다.

어떤 공동체가 있었다. 그 이름을 무엇이라고 붙일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김광석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던 시기. 대략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 그 공동체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해체는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 공동체가 품고 있던 꿈의 시효는 싫고 좋고의 문제, 즉 취향의 문제로 다가왔던 때가 있었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취향이란 정치적인 것이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이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고 대체로 단순했다.

그래서 대중가수 김광석의 활동 기간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활동기간과 그리 시차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뜻밖이다. 김광석의 죽음이 서지원의 죽음과 함께 논의되는 일도 그리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김광석의 전성기는 세상이 이미 변해 버린 다음, 적어도 변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이런 뜻밖의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김광석을 1990년대 이후의 대중연예계로부터 구원하고 싶은 충동도 강해질 것이다. 공동체가 연예계로 전변하던 모멘트, 그 싫지 않은 쾌락의 간극에 김광석은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이 공동체를 '운동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김광석이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후보 백기완의 유세장에서 '타는 목마름으로'를 목놓아 불렀다거나, 몇 년 전 나온 박스세트에 '녹두꽃'의 절창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하는 것은 한국에서 대중음악과 대중문화의 역사를 '수난사'로 해석하고 싶은 충동일 것이다. 이건 이제 시효만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유효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광석을 회상하거나 그의 노래를 다시 들었을 때 어떤 절박함이 밀려온다면? 쉬운 답변이 있다. 그 절박함이란 한 세대의 공통감각이라는 답변. 그렇지만 이런 답변이 설명해주는 것은 많지 않다. 즉, 카 스테레오로 김광석의 CD를 듣는 사람의 정서는 설명해줄 수 있지만, 지방 소도시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의 무대에 올라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를 부르는 한 아저씨의 정서는 설명해 주지 못한다(나는 이 장면을 실제로 TV에서 보았다). 그에게서 김광석 노래의 의미는 이 글의 필자와 독자와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슈퍼스타의 부재. 1980년대를 주름잡은 1950년생 조용필과, 1990년대를 주름잡은 1972년생 서태지 사이에서 '1960년대산' 슈퍼스타는 부재했다(참고로 전인권도 1955년생이고, 해바라기의 이주호는 1957년생이고, 이문세도 1958년생이다). 달리 말해서 자신이 동일시할 수 있는 슈퍼스타의 부재가 그 세대의 멘털리티다. 어떤날(조동익ㆍ이병우)과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ㆍ전태관)은 은밀한 숭배의 대상 이상은 아니었다. 이 무렵 슈퍼스타가 대중가수가 아니라 전대협의장이었다는 점이 한국 사회의 희비극이다.

결론적으로 김광석은 미완의 슈퍼스타였다. 어떤 공동체의 꿈이 실현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의 슈퍼스타덤은 완성될 수 없었다. 그 공동체의 꿈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 충분히 확인된 다음에 윤도현이 슈퍼스타의 지위에 근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완이었기에, 실현불가능할 수 없었기에 그의 노래들은 절박하게 다가온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그가 노래할 때, 그는 아픔을 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무모하게 낭만적 사랑에 신뢰를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낭만적 사랑이 사회적 정의와 민주화에 공헌했다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우리는 그런 발언이 가능한 공간을 찾아내야 하는 것일까.
첨부파일
razliv_267663_1[1].mp3

덧붙이는 글 | ※ 흘러나오는 노래는 김광석이 84년 노래모임 '새벽' 활동 시절 '또 다시 들을 빼앗겨'란 공연에서 부른 노래 '녹두꽃'을 녹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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