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새로 생겨난 일들은 ‘숨어있는’ 노동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반 일리히는 그것을 ‘그림자노동’이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형태인 가사노동과 더불어, 교육, 보육, 통근 등과 같이 지불되지 않는 그림자노동에 그는 관심을 기울인다.
그에 따르면, 그림자노동은 산업경제와 함께 생겨났다. 노동자가 한 시간씩 차를 운전하여 스스로를 직장으로 출근시키고, 직장에서 번 돈으로 다시 차의 할부금과 연료비를 지불하는 것처럼, 그림자노동은 임금노동에 의존한다. 반대로 임금노동은 가사노동이라는 그림자노동에 의존한다. 이렇게 그림자노동과 임금노동은 한 쌍을 이루며 산업경제를 구성한다.
이반 일리히는 그림자노동을 ‘고유한 노동’과 비교하는데, 여기에 그림자노동을 이야기하는 실익이 있다. ‘고유한 노동’이란 인간 생활의 자립과 자존을 위한 노동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보기에 현대의 그림자노동은 인간 생활의 자립과 자존을 위한 노동이 아니다. 오히려 자립과 자존을 파괴하는 노동이다.
다시 가사노동의 예를 살펴보면, 예전에는 가사란, 남성과 여성이 가정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현재의 가사는 산업적 상품에 의해 규격화되어 있다. 즉, 소비를 요구하는 것으로, 임금노동을 필요로 한다. 또한 성별을 구별하면서 여성에게 강요된다. “여성은 과거에는 가족을 위하여 생활의 자양을 제공하는 가정의 여주인이었으나, 이제는 취학 전의 아이들이 머무르고 남편이 휴식하며 남편의 소득이 소비되는 장소의 수호자”로 전락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가사노동이 현대 산업경제 아래서 본질적으로 그림자노동인 이상, 그것을 화폐가치로 환산한다고 해도 '가사노동가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선택을 요구한다. 소유에서 만족을 구하는 사회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행위에서 만족을 구하는 사회를 택할 것인가? 임금과 연봉에서 해방되어 일한다는 것을 ‘슬픈 재난’으로만 보아야 하는가? 그것을 도리어 ‘유익한 권리’로 볼 수는 없을까?
상품집약사회는 임금노동의 생산물로 수요를 충족시킨다. 그러한 사회는 임금을 위한 노동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며 자율적 활동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하지만 어떤 사회가 인간 생활의 자립과 자존을 지향하는 생활방식을 선택한다면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인간 자신의 활동을 통해 필요한 것을 구하고 산업적 도구를 ‘공생적’ 도구로 바꾸게 된다면, 임금노동과 그림자노동은 함께 쇠퇴할 것이다. 그 때에는 아마 “레코드보다는 기타가, 교실보다는 도서관이, 슈퍼마켓에서 고르는 것보다는 뒤뜰에서 고르는 것이 더 가치 있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그림자노동>은 <도서출판 미토>에서 내놓은 <이반 일리히 전집> 중 한 권이다. 발전을 향해 무섭게 돌진하는 현대 사회에 어지럼증이 인다면, 이반 일리히의 다른 책도 흥미로울 것이다. <학교 없는 사회>,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성장을 멈춰라!> 등이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