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뉴스에 나오는 젊은이의 '자살'보도에는 가끔씩 이해 못할 원인이 등장하곤 한다. 애인에게 변심 당해 자살했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사랑하지 못했음과 사랑 받지 못했음, 이것이 자신의 생과 사를 결정짓는 잣대가 된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젊은 날에 갖는 죽음의 이유가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라는 것을 방증 한다. 죽음의 유혹이 어떤 물질적이거나 현실적인 고통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 못 할 이런 죽음의 양상, 하지만 이것은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베로니카, 하지만 그녀는 지극히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에 지쳐 자살을 하기로 하고 수면제를 과다복용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살아남는다. 그리고 "곧 죽게된다"는 정신병원 의사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고통 속에서 신음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죽음의 공포와 맞서며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그 희망이란 것은 다름 아닌 주변의 사람들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사이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정신병원 환자 제드카, 마리아 그리고 사랑하는 에뒤아르를 보며 살고자 하는 희망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젊은이에게 있어서 특별하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베로니카에 있어 죽음에서 삶으로 이끄는 원동력과도 같았다. 단조롭고 지루했던 베로니카의 일상은 사랑하는 에뒤아르와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알고 나서부터는 달라진다. 살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고 베로니카는 행동하고 반응한다.
"죽음을 자각했을 때 인생은 더욱 치열해 진다."
왜일까? 소설의 문구가 내 머릿속에도 선명히 각인된다. 생각해 본다. 의사나 누군가로부터 "곧 죽게 된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과연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 떨 수도 있을 것이고, 그저 삶을 포기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빛내기 위해 살고자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들은 너무도 찬란해 차마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베로니카 역시 살고자 했다. 물론 베로니카가 죽음을 두려워 한 것은 아니다. 이미 한번 죽음을 선택했었고, 일주일 후 죽는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도 담담했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살고 싶어 했다. 자신이 선택했던 죽음이란 것이, 지루하다 생각했던 일상이 찬란히 빛나는 젊음 앞에 얼마나 무의미한 것을 알아갔기 때문이다.
젊음이란 그런 거야. 젊음은 몸이 얼마나 버텨 낼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지. 하지만 몸은 언제나 버텨내.
젊음의 시기는 특별하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그 젊음이 어디로 향할지 몰라도 젊음이 존재한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재미있고 신이 난다. 자살이란 '극단적 죽음'에서 살아난 베로니카는 이 점을 깨닫고 있었다.
젊음, 그녀에게 남겨진 일주일이란 시간은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일주일은 절망의 시간이 아닌 하루하루의 젊음을 7번이나 만끽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보다도 내일보다는 당장 오늘의 젊음이 중요하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이 자명한 사실을 젊은이들에게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