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여느 때보다 일찌감치 찾아 든 이불 속에서 내 인생 최초로 죽음을 떠올린 때가. 무시무시한 공포가 밀려들었지만 누구와도 상의하기 힘들었다. 그 공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인데 막상, '죽음'이라는 것의 정체를 몰라서 그 공포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으리라.
최근 <불륜>이라는 파격적인 제목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브라질 출신 작가, 파울로 코엘료인데,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또 하나의 도발적인 제목의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일독을 권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미혼의 젊은 여성, 베로니카다. 그녀에게 삶이란 살아보나마나 그 과정과 끝이 뻔하기 때문에 경험하느니 차라리 어서 마감하는 편이 나은 개념이다. 때문에 베로니카는 6개월 동안 수면제를 사서 모았다.
시도한 자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생환한 그녀의 귓속에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고, 그래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라는 말이 제 3자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이 세상이 살만 한 이유는 끊임없는 '변화'의 덕이라는 걸까. 무료한 일상이라는 것이 같은 일의 무한 반복과 동의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베로니카의 삶은 안정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과 아무런 차이도 그런 차이를 극복할 변화도 없었던 것일까.그런데,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슬로베니아다. 국제정치의 복잡한 함수에 따른 격변을 겪은 국가인데, '뻔한 삶'에 환멸을 느껴 자살을 결심한 베로니카의 조국으로 어째 어울리지 않으니 말이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유고연방공화국 등은 모두 유고슬라비아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다.
베로니카가 생환한 곳은 '빌레트'라는 정신병원이다. 이제는 상식이 된 정보이긴 하지만 말하자면 정신병원에는 정신병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나 사회가 요구하고 추구하는 이념과 사상에 위배되는 언행을 일삼는 부적응자들이 정신병자들과 구분되지 않은 채로 섞여 있기 때문이다.
베로니카가 만난 환자들도 자신만의 삶을 찾아 헤매다가 부적응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이다. 소설은 에피소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유정의 장편소설 <내 심장을 쏴라>와 매우 닮아 있다. 이야기들은 모두 정신병자라는 존재가 어쩌면 우리 사회의 현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리트머스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베로니카가 공황장애를 앓다 들어온 마리아로부터 듣는 옛날이야기를 듣다 보면 누가 누구를 정신병자로 부를 수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옛날 왕과 왕비가 살았는데, 우물에 풀린 이상한 약 때문에 나라 안 사람들 모두가 미치게 됐다. 미친 백성들은 급기야 왕과 왕비를 탄핵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른 나라로 피신하자는 왕에게 왕비는 말한다. 왕은 왕비의 말을 따랐고 나라는 평화를 되찾았다. 왕비가 왕에게 한 말은, "우리도 우물에 가서 그 물을 마셔요."
친구가 권한 책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언젠가는 겪을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미리 앞당길 필요도 없다고 충고한다. 또 과중한 업무로 영혼을 피폐하게 해서도 곤란하다고 조언하고 있으며, 어차피 살아내야 할 삶이라면 흐르는 물처럼 나와 내 주변을 감싸 안아야 한다고도 말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2001년 2월 초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