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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에서 맞는 새벽
만경강에서 맞는 새벽 ⓒ 김준
비응도 새만금 공사현장에 걸린 법원 결정 환영 플래카드
비응도 새만금 공사현장에 걸린 법원 결정 환영 플래카드 ⓒ 김준
고기잡이배, 도로 위로 올라오다

내초도에서 오식도를 지나 비응도까지, 고속도로보다 넓은 길이 확 뚫렸다. 이곳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조개를 캐고 고기를 잡던 어민들의 생활터전이었다. 고깃배들은 도로 위로 올라와 겨울바람에 날리는 모래바람을 맨살로 맞고 있다.

비응도에서 시작된 방조제는 야미도까지 바다를 가로질렀다. 이곳은 어민들이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치는 '4공구'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곳을 새만금 갯벌의 '숨통'이라고 하는 이유는 만경강에서 내려온 강물과 서해의 바다가 만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하구갯벌의 생명은 바다와 민물이 오갈 수 있는 물길에 있다. 이 물길이 막히면서 바닷물과 민물은 더 이상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선 물길 따라 올라오던 숭어며, 실뱀장어를 더 이상 잡을 수 없다. 생합이며, 바지락이며, 가무락도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모래갯벌에 펄이 쌓이면서 칠게가 나타나고 생태계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비응도 인근 도로 위로 올라온 고기잡이 배
비응도 인근 도로 위로 올라온 고기잡이 배 ⓒ 김준
내초도 갯벌의 최병수 작가의 작품이 쓰러질 듯 버티고 있다.
내초도 갯벌의 최병수 작가의 작품이 쓰러질 듯 버티고 있다. ⓒ 김준
고기잡이를 나서던 어민들은 물길이 막히면서 저 멀리 부안의 신시도 앞까지 배를 끌고 방조제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기름 값이 만만치 않아 조업을 포기했다. 고기도 잡히지 않는데 기름 값은 과거에 비해서 2배나 더 드는 일을 선택할리 없다. 방조제를 원망하듯 고개를 돌린 배들의 발이 묶여 있고, 많은 배들이 육지로 올라와 있다.

세월이 흐른 흔적들이 느껴진다. 옆에는 '서울고법의 현명한 결정을 적극 환영한다'는 새만금 사업추진을 주장하는 단체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 너머에 고기잡이로 생활하던 섬 주민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 '비응어항 관광개발'사업을 추진하는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지난 핵광풍이 불던 때, 군산시에서 동굴식으로 핵폐기장 시설을 건설하겠다고 계획을 세웠던 곳이기도 하다.

눈 덮힌 곰소염전
눈 덮힌 곰소염전 ⓒ 김준
염전에 하얀 눈이 내려앉았다

새만금 방조제를 지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모항마을과 작당마을 사이에선 김양식을 하는 어민들이 바쁘다. 한 때 '부안 김'하면 전국에서도 알아주었다. 김 양식의 생명은 조류에 있다. 특히 민물과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김은 품질이 좋다. 그래서 섬진강 하구 금호도와 태인도 인근의 갯벌에서 김양식이 시작되었다. 완도 김이 명성을 잃어갈 무렵 부안 김이 그 뒤를 이었지만, 이제 명성을 잃고 있다. 이것도 새만금 사업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어민들의 이야기이다.

새벽에 모항 앞 바다에서 이각망 그물을 털고 있는 어민
새벽에 모항 앞 바다에서 이각망 그물을 털고 있는 어민 ⓒ 김준
새벽녘이면 어부들이 바쁘다. 모항 앞 바닷가에 각망을 설치한 어부가 작은 배를 타고와 그물을 보고 있다. 아마도 인근에서 식당을 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이각망으로 보이는 그물을 털어 넣는 모습이 아무래도 쏠쏠하게 잡힌 모양이다. 자연산 활어로 도시민들의 미각을 자극할 횟감으로 판매될 것이다.

지난 연말과 연초에 집중적으로 내린 폭설로 부안의 논과 밭은 모두 하얀 바다로 변했다. 지평선 축제를 하는 곳으로 알려진 김제평야도, 부안의 갯바닥도 모두 하얗다. 부안 특산품 소금을 만들어내는 곰소염전은 마치 소금을 앉혀 놓은 것 같다. 지금이라도 대패질(소금을 긁는 것을 말함)을 하면 소금이 모아 질 듯하다.

ⓒ 김준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던 날 바다와 갯벌을 본 적이 거의 없는 창원대 학생들과 함께 새만금을 찾았다.

"이렇게 갯벌이 넓은지는 몰랐다."
"지역발전을 위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와서 보니까 정말 이건 아니다."

모닥불에 굴을 구워 까먹던 학생들, 해창갯벌에서 마저 듣지 못한 어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다시 찾겠다는 의지도 보인다.

장승들의 절규 '해수유통하라'
장승들의 절규 '해수유통하라' ⓒ 김준
'갯벌로 간 장승'은 외롭다

새만금 사업의 또 다른 출발점은 부안의 해창갯벌, 그곳의 분위기는 군산의 비응도와 사뭇 다르다. 두 눈을 부릅뜬 장승들이 커다란 돌덩이를 싣고 찬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트럭을 지켜보고 있다. 장승들은 몸에 '새만금 갯벌은 살아야 한다' '해수유통하라'는 플래카드를 묶고 아무도 찾지 않는 펄에서 갯바람에 맞서고 있었다. 몇 년 전 이곳 해창갯벌엔 환경을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단체들이 너도 나도 장승을 세웠다.

물이 빠진 해창갯벌에는 철새도 없다. 오직 100여 개의 장승들이 주인을 잃고 울부짖고 있다. 해창갯벌에 장승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초반쯤이었을 것이다. 새만금사업에 대한 반대여론이 확산되고 삼보일배가 이어지면서 법원의 공사중단 결정이 내려질 무렵, 대한민국에서 환경운동을 한다는 단체들은 모두 새만금 갯벌에 장승을 세웠다.

새만금 전시관이 빤히 내다보이는 해창갯벌은 새만금 갯벌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 지난 2000년인가 매향을 했고, 천주교와 불교 그리고 기독교와 원불교가 컨테이너 박스로 의례공간을 만들었다. 갯벌에 세워진 장승은 이제 단순한 말뚝장승을 넘어 새만금갯벌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에 해창산을 지키려는 두 달여 싸움의 과정 속에 인근 주민들과 결합되면서 인간과 신, 그리고 자연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해창갯벌에 모인 학생들(창원대)에게 새만금 갯벌을 설명하는 고은식(계화도)님.
해창갯벌에 모인 학생들(창원대)에게 새만금 갯벌을 설명하는 고은식(계화도)님. ⓒ 김준
공사 재개 결정 이후 대형트럭의 이동이 잦아진 가력도 공사 현장
공사 재개 결정 이후 대형트럭의 이동이 잦아진 가력도 공사 현장 ⓒ 김준
그곳을 가장 먼저 떠난 사람들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곳에서는 목탁소리도, 기도소리도 듣기 어렵다. 오직 남아 있는 것은 주인을 기다리는 장승들뿐이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담아 박아 놓은 장승만 남겨둔 채 모두 어디론가 가버렸다.

"저놈의 장승들."
"몽땅 뽑아다가 청와대 한 복판에서 쌓아두고 불질러버릴 생각도 했다."

학생들과 함께 그곳을 찾은 계화도에서 들은 어민의 넋두리이다.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며 마치 자신들의 분신인양 새만금을 외쳐대던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장승은 외롭다. 새만금 사업이 이슈가 되어 여론에 관심을 끌 때는 너도 나도 새만금을 찾던 운동단체들은 전부 어디 가고 장승만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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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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