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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으로 제주초가는 초토화되었다. 사진은 중요민속자료 제71호로 지정된 성읍민속마을 한봉일 가옥.
1970년 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으로 제주초가는 초토화되었다. 사진은 중요민속자료 제71호로 지정된 성읍민속마을 한봉일 가옥. ⓒ 김동식
박 대통령의 눈에는 '초가'가 가난의 찌꺼기 정도로 보였던 것 같다. 조국 근대화를 이루는 길목에 거둬내야 할 걸림돌로 여긴 것이다. 발상 자체가 고약하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더 화가 치민다.

이 운동은 1969년의 3선개헌, 1971년의 대통령선거와 비상사태선포, 그리고 1972년의 유신헌법 통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 군부정권의 상징이었다. 공과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겨야겠지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돌파구로 삼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제주초가가 사라지면서 오랜 세월 제주 섬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준 마을공동체가  무너져 갔다. 사진은 제주민속촌의 초가와 우영팟(텃밭) 모습
제주초가가 사라지면서 오랜 세월 제주 섬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준 마을공동체가 무너져 갔다. 사진은 제주민속촌의 초가와 우영팟(텃밭) 모습 ⓒ 김동식
새마을운동으로 사라진 수눌음 문화

새마을가꾸기사업으로 제주문화는 애환이 많았다. 오랜 세월 삶의 문화를 지탱해준 마을공동체가 무너졌다. 해마다 안거리, 밖거리를 번갈아 가며 초가를 일던 '수눌음' 문화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집안에 잔치나 장례를 치를 때 담을 허물어 집을 빌려주던 담장이 사라지고, 대신 시멘트 벽돌이 훈훈한 소통을 막아 버렸다.

마을사람들의 일과 놀이, 삶과 죽음이 하나의 소우주로 연결되는 공동선(共同線)이 잘려 나갔다. 인정과 미덕이 넘치던 마을 전통이 산업병에 앓아 누우면서 서로 방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유신정권과 함께 물질과 외관이 풍요의 척도가 되는 문명사회로 나아간 것이다.

제주마을을 돌아다녀봐도 사람이 살고 있는 초가를 만나기란 여간 어렵다. 아예 씨가 말라버린 자연부락이 훨씬 많다. 성읍민속마을이 고작이다. 2006년 현재 민속마을 이외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는 전통초가도 5채에 불과하다.

제주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초가를 거의 만나기가 힘들다. 사진은 제주 성읍민속마을의 한봉일 가옥.
제주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초가를 거의 만나기가 힘들다. 사진은 제주 성읍민속마을의 한봉일 가옥. ⓒ 김동식
마을은 더 이상 전통문화의 보고도 아니며, 새로운 문화창출의 동력도 상실하고 말았다. 마을공동체의 자율성이 무너진 것도 문제다. 공동체 삶에서 터득한 지혜가 쓸모가 없어지고, 마을 고유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그것은 획일화로 치닫는 다리를 놓아준 꼴이었다.

제주초가는 박 정권이 본 것처럼 문명에 어긋나는 의붓자식이 아니다. 벗어나려 했던 가난의 굴레도 아니다. 고귀한 전통이 살아있는 공동체 삶의 버팀목이었다. 제주초가의 탄생 과정도 특별하다. 제주의 자연과 섬사람들의 삶의 문화가 조화를 이룬 모습이 놀랍게도 과학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태평양을 건너 온 바람을 극복해 내는 독특한 삶의 양식이 주거문화에 배어 있다. 사진은 제주민속촌의 초가 모습.
남태평양을 건너 온 바람을 극복해 내는 독특한 삶의 양식이 주거문화에 배어 있다. 사진은 제주민속촌의 초가 모습. ⓒ 김동식
매서운 바람과 싸워온 제주초가와 돌담

태풍의 길목에 위치한 제주는 바람 많은 화산섬이다. 제주 섬사람들의 삶을 보려면 돌과 바람을 빼놓지 말아야 한다. 섬을 지배해 온 척박한 환경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성가신 존재로 제주 사람들의 삶에 가시가 박힌 바람을 막는 것은 돌담의 몫이다. 제주 사람들은 초가의 벽을 이루는 '축담'과 올래(길가에서 좁은 골목을 거쳐 집안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울담', 밭과 밭의 경계를 짓는 '밭담' 등을 쌓으면서 매서운 바람과 싸워왔다.

바람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바람을 극복해 내는 독특한 삶의 양식이 주거문화에 배어 있다. 유선형의 초가지붕과 부드럽게 돌아가는 곡선형의 올래가 조화를 이루면서 제주의 선이 빚어낸 아름다운 건축문화가 그렇다. 제주 옛마을에 들어서면 자기도 모르게 아늑함과 정겨움이 다가오는 이유도 될 듯하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올래는 거센 바람을 한 번 더 죽이는 풍속감속기능이 있으며, 안채의 정면을 빗겨나도록 되어 있다. 사진은 제주민속촌 올래 모습.
곡선으로 이루어진 올래는 거센 바람을 한 번 더 죽이는 풍속감속기능이 있으며, 안채의 정면을 빗겨나도록 되어 있다. 사진은 제주민속촌 올래 모습. ⓒ 김동식
곡선으로 이루어진 올래는 거센 바람을 한 번 더 죽이는 풍속 감속기능이 있다. 또 안거리(안채)의 정면을 빗겨나도록 되어 있다. 바깥 행인의 시선으로부터 독립된 내부공간을 확보하려는 조상들의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다.

제주의 전통초가들은 바람의 언덕에 있기 때문에 고유의 건축양식을 가졌다. 집채의 바깥벽에는 자연석이나 징으로 쪼아 다듬은 돌로 축담을 쌓고, 볏짚이나 보릿짚을 버무린 흙을 함께 발랐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장대비와 함께 초가의 옆구리를 치더라도 끄떡없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축담이 무너지지 않는다.

제주초가는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지붕이나 축담이 무너지지 않는다. 사진은 제주민속촌 초가 모습.
제주초가는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지붕이나 축담이 무너지지 않는다. 사진은 제주민속촌 초가 모습. ⓒ 김동식
지붕은 띠풀(제주에서는 '새' 라 부른다)로 여러 겹 덮은 다음 직경 5cm 가량의 굵은 '집줄'로 단단히 얽어매었다. 바둑판을 닮았다. 그래서일까. 세계 어느나라 초가지붕에도 다 있는 지네 모양의 용마름이 없다. 유별난 지붕마루다. 1년 또는 2년에 한번씩 '새'를 이어 덮은 위에 다시 덮으므로 상마루의 선이 완만하다. 제주오름을 닮아 선이 부드럽다. 덕분에 제주초가의 지붕은 아무리 강한 돌풍이 휘몰아쳐도 날아가거나 뒤집어질 염려가 없다.

초가를 수호하는 울담은 처마 끝까지 에둘러져 있다. 얼기설기 돌담을 쌓았기 때문에 바람구멍이 나 있다. 이 구멍들은 돌담이 바람에 무너지는 것을 막아준다. 아무리 세찬 바람이라도 돌담 구멍에 걸리면 그 기세가 한풀 꺾여 초가를 튼튼히 지켜준다.

놀라운 제주초가의 과학적 건축원리

전통적인 초가에는 굴뚝을 찾아볼 수 없다. 난방기술도 연구대상이다. '굴묵(난방용 아궁이)' 안으로 연료(마소똥이나 짚단)를 집어넣었을 때 통풍이 잘 되면 금세 타고 재가 되고 만다. 밤새 따뜻한 구들(온돌방)을 유지하려면 공기를 차단할 필요가 있다. 굴묵 입구도 일단 땔감이 들어간 다음에는 판석으로 막았다. 마지막으로 틈새를 잿가루로 봉쇄하여 공기의 소통을 차단한다. 밤새 천천히 타들어 가도록 하는 원리다. 굴뚝을 만들지 않는 이유다.

그 옛날 제주 사람들은 굴묵(난방용 아궁이)에 마소똥이나 짚단을 집어넣고 불을 지펴 엄동설한을 이겨냈다. 사진은 제주민속촌 굴묵 모습.
그 옛날 제주 사람들은 굴묵(난방용 아궁이)에 마소똥이나 짚단을 집어넣고 불을 지펴 엄동설한을 이겨냈다. 사진은 제주민속촌 굴묵 모습. ⓒ 김동식
겨울철 찬바람이 불어오면 따뜻한 아랫목에 깔아둔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던 기억이 새롭다. 구둘 바닥에 몸을 대고 있으면 몸에 다가오는 온기가 제법이다. 요즘에는 보일러나 전기장판으로 돈을 주며 한겨울을 나지만 그 옛날 제주 사람들은 자연친화적으로 엄동설한을 이겨냈다.

방안의 벽은 시멘트가 아니라 흙벽이다. 제주에서는 나무 기둥 사이에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대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뼈대를 만들고 여기에 흙을 발랐다. 흙벽의 두께는 대략 10cm 정도. 흙은 방안이 습할 때면 습기를 먹고, 건조할 때면 습기를 내뿜어 주는 천연습도조절 장치다. 겨울철에 나무나 흙 모두 구들에 불을 놓았을 때 건조해지는 것을 막고, 여름철에 집이 지나치게 습해지는 것을 막았다. 그래서 제주초가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 제주 사람들이 바람과 맞서 싸우면서 얻은 지혜의 소산이다.

제주초가는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가족의 생활영역은 서로 독립적이다. 사진은 중요민속자료 제68호로 지정된 성읍민속마을 조일훈 가옥.
제주초가는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가족의 생활영역은 서로 독립적이다. 사진은 중요민속자료 제68호로 지정된 성읍민속마을 조일훈 가옥. ⓒ 김동식
제주초가는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가족의 생활영역은 서로 독립적이다. 초가는 규모에 따라 외거리집, 두거리집, 네거리집 등으로 구분했다. 두거리 이상의 집은 각 채마다 부엌이 따로 있다. 부모와 아들내외 사이의 가족이 취사를 각각 따로 하고 생산·소비·경제를 독립적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섬 밖의 육지 민가와 가족제도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대목이다.

뒤뜰은 그 집의 상징이 될 만한 나무 등을 심었으며, 안거리 뒷문을 이용해야만 출입할 수 있고 외부와는 통하지 않도록 만든 폐쇄적인 공간이다. 사진은 제주민속촌 뒤뜰 모습.
뒤뜰은 그 집의 상징이 될 만한 나무 등을 심었으며, 안거리 뒷문을 이용해야만 출입할 수 있고 외부와는 통하지 않도록 만든 폐쇄적인 공간이다. 사진은 제주민속촌 뒤뜰 모습. ⓒ 김동식
박제품으로 살아가는 제주초가의 운명

자연마을을 돌아보는 발걸음이 무겁다. 제주에는 초가가 거의 사라졌다. 문명으로부터 이토록 처참하게 버림받았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어깨를 누른다. 국가에서 지정한 성읍민속마을이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초가 사이로 오백 년의 긴 세월이 흐르고 있는 것도 고마울 따름이다.

이곳에도 아쉬움은 남아 있다. 정부가 민속마을로 지정했지만 보존을 위한 관리는 아예 손을 놓아 버렸다.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내맡긴 채 수수방관이다. 도로는 여기저기 덧씌워져 보기에 민망하다. 정취 어린 골목길과 올래는 아스팔트와 시멘트 포장으로 범벅이 됐다. 좁은 도로 한가운데로 하수구 뚜껑은 왜 그렇게 여기저기 솟아났는지 이해할 자신이 없다.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박제품이 되어버린 이들 초가가 앞으로 제주를 상징하는 유일한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사진은 제주민속촌 관람 모습.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박제품이 되어버린 이들 초가가 앞으로 제주를 상징하는 유일한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사진은 제주민속촌 관람 모습. ⓒ 김동식
초가는 초가대로 원형 보존과는 다른 방향으로 길을 헤매고 있다. 공사장 합판을 덧붙여 놓았는가 하면, 돌과 흙으로 마감해야 할 곳에 벽돌과 시멘트가 차지하고 있다. 창호지를 바르거나 나무문이 있어야 할 곳에는 유리창과 찌그러진 양철판이 붙어 있다. 국가와 지방정부의 관심지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제주민속촌박물관은 이와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1890년대를 기본연대로 제주초가의 원형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관리상태도 양호하다. 100여 채의 초가가 한결같다. 곱씹어 보면 근원적인 문제에 생각이 걸린다. 이것은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박제품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들 초가가 앞으로 제주를 상징하는 유일한 문화유산이 되어야 할 판이다. 서글픈 제주초가의 운명이다.

자연환경과 마찬가지로 한번 망가지면 다시 생명을 틔우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투병 중인 제주초가에서 뼈저리게 느낀다. 보존을 위한 원칙과 문화자원을 껴안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 사이에서 우리나라 문화재 당국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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