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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는 아직도 놀이문화가 살아 있다. 다만 삶의 뒷 언저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고향에는 아직도 놀이문화가 살아 있다. 다만 삶의 뒷 언저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 김동식
예전과 같지 않지만 고향에는 문화가 살아 있다. 언제나 든든한 힘이 돼주는 고향 사람들이 남아 있는 한 그 문화는 잠시 삶의 언저리에 있을 뿐 아주 사라진 게 아니다. 그 중에 놀이문화가 있다. 어른들에게는 추억거리로, 아이들에게는 낯선 놀이에 대한 경외심으로 마주치는 우리 놀이다. 이번 설은 우리 놀이를 즐기며 쏠쏠한 재미를 맛보는 것도 좋겠다.

놀이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 옛날 마을은 하나의 작은 우주였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부부의 연을 맺어 가정을 이루고,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살아가는 일이 거의 마을공동체에서 이루어졌다. 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가 그렇다는 것이다. 놀이문화도 이 곳에서 싹텄다.

그 옛날 마을은 하나의 작은 우주였다. 놀이문화도 이 곳에서 싹텄다.
그 옛날 마을은 하나의 작은 우주였다. 놀이문화도 이 곳에서 싹텄다. ⓒ 김동식
어른들의 놀이에서는 마을공동체를 유지하는 정서적 연대가 강했다. 문화사회학에서는 두레와 품앗이, 계와 부조 등에서 그 뿌리를 찾기도 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줄다리기, 차전놀이, 강강술래, 놋다리밟기, 횃불싸움, 쥐불놀이, 북청사자놀음, 가마싸움 등이 벌어졌다. 자주 있는 놀이는 아니다. 대개가 일과 일 사이의 틈새를 메우는 방식이다. 가뭄에 콩 나듯이 간간이 있는 일이지만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일과 놀이의 균형이 깨지지 않았다. 놀이마당은 주로 명절처럼 세시풍속을 맞아 펼쳐졌다. 지금은 그마저도 문명에 밀려나 있다. 수많은 전통 민속 놀이문화가 폐기되거나 전승 구현이라는 이름으로 박제화 돼 있다.

생명력이 긴 놀이문화는 역시 아이들의 몫이다. 놀이가 생성, 변화, 소멸, 재창조 과정을 거치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 세월이 변해도 술래잡기, 숨바꼭질, 공기놀이, 제기차기, 고무줄놀이, 딱지치기, 여우놀이 등은 지금도 동심을 실어 나른다. 시골에서는 이들 놀이 말고도 자치기, 땅따먹기, 소라놀이, 굴렁쇠 굴리기, 사방치기, 못치기, 말타기, 가마타기, 구슬치기, 그림자밟기를 즐기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반성의 거울에 비친 전래놀이와 현대놀이

생명력이 긴 놀이문화는 역시 아이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세월이 변해도 아직도 많은 전래놀이가 동심을 실어 나르고 있다.
생명력이 긴 놀이문화는 역시 아이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세월이 변해도 아직도 많은 전래놀이가 동심을 실어 나르고 있다. ⓒ 김동식
이번 설 명절을 맞이하면서 아이들에게 놀이문화의 희망을 거는 것은 몇 가지 욕심 때문이다. 그 하나는 전래놀이를 되돌아보며 오늘의 문명사회를 반성의 거울로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대 놀이문화의 건강성 회복에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전래 놀이문화와 현대 놀이문화를 비교해 보면 그 결과가 심상치 않다.

우선 놀이공간에서 차이가 있다. 전래놀이는 무대가 집 밖이다. 산과 들, 마을 골목이 모두 놀이터다. 하늘과 바다, 강이 모두 놀이공간이다. 자연의 변화를 경험하고 그 변화되는 과정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놀이다. 이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엄청난 축복이다. 그래서 자연친화적이다. 마을공동체가 해체된 가운데 이뤄지는 현대놀이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대개 집안 컴퓨터 단말기 앞이거나 콘크리트로 덮인 도시 한복판이다.

전래놀이는 무대가 집밖이다. 산과 들, 마을언덕과 골목이 모두 놀이터다. 하늘과 바다와 강이 모두 놀이공간이다.
전래놀이는 무대가 집밖이다. 산과 들, 마을언덕과 골목이 모두 놀이터다. 하늘과 바다와 강이 모두 놀이공간이다. ⓒ 김동식
놀잇감을 마련하는 번지수도 틀리다. 전래놀이는 나무막대기, 깨진 옹기조각, 돌멩이, 동물뼈, 들꽃과 들풀, 흙과 모래 등 자연으로부터 제공받는다. 자연에 의존하며 자연의 숨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놀잇감은 직접 만들기도 하고 자연을 활용하기도 한다. 이들 놀잇감은 재생산, 재활용이 가능하다. 생산성이 강하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터득하게 된다. 놀잇감에서 아이들 사이의 신분 차이나 소외감은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현대놀이는 공장 의존적이다. 놀잇감을 아이들 스스로, 또는 부모가 직접 만들어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 돈을 주고 사야 놀이가 가능하다. 이들 놀잇감은 플라스틱이거나 재생산, 재활용이 불가능한 게 많다. 소비성이 강하다. 전래놀이와는 달리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의존하려는 경향이 심한 편이다. 놀잇감의 질과 가격 차이로 아이들 사이의 불평등 차별곡선이 그려진다. 이런 놀이로 사회성과 협동심, 창의성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놀이방식도 전혀 다르다. 전래놀이는 대개 마을이라는 공동체 사회에서 서로 만나 부대끼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공동체 정신을 훼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만큼 놀이의 규율과 질서는 깨지지 않았다. 물론 놀이의 가장 큰 흥미와 관심은 승부를 빼면 발생하지 않는다. 매일 새로운 편이 만들어지고 또 판이 거듭될수록 승부가 바뀌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승자를 가리는 놀이가 아니다. 승부를 즐기는 놀이이다.

현대 놀이문화를 주도하는 것은 컴퓨터 게임이다. 아이들은 컴퓨터와 소통한다. 게임의 상대방이 있는 경우에도 서로 만나는 일은 없다. 그래서 게임방식은 일방적이며 폭력적이다. 상대방을 쓰러뜨려야만 내가 살 수 있는 자본주의 논리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상대가 없는 게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놀이 수준의 단계를 밟으며 더 높은 수준에 올라 세상을 호령하고 싶은 헛된 꿈이 아이들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전래놀이는 나무막대기, 옹기조각, 돌멩이, 동물뼈, 들꽃과 들풀, 흙과 모래 등 자연으로부터 제공받는다. 자연친화적이다.
전래놀이는 나무막대기, 옹기조각, 돌멩이, 동물뼈, 들꽃과 들풀, 흙과 모래 등 자연으로부터 제공받는다. 자연친화적이다. ⓒ 김동식
놀이정신은 어떨까. 우리 전래놀이의 핵심은 민속놀이와 마찬가지로 '대동정신'에 있다. 모두가 차별 없이 놀이를 하면서 '하나'를 만들어가는 정신이다. 아이들이 대동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이념과 운영의 원리다. 오늘날 현대놀이에서 대동을 체험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놀이공간부터 이에 비협조적이다. 놀잇감을 마련하는 과정도 대동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지극히 개별적이며, 폐쇄적이다.

아이들에게 챙겨주어야 할 놀이문화

무분별한 외래문화와 상업 중심의 자극적 놀이에 중독 돼 가는 청소년들에게 전래놀이는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놀이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놀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도 어른들의 책임이다. 시대의 속도에 밀려 자신들의 고유한 세계마저 빼앗겨 버린 아이들에게 열린 공간과 아름다운 추억을 돌려줄 의무가 있다.

시대의 속도에 밀려 자신들의 고유한 놀이문화마저 빼앗겨 버린 아이들에게 열린 공간과 아름다운 추억을 돌려줄 의무가 있다.
시대의 속도에 밀려 자신들의 고유한 놀이문화마저 빼앗겨 버린 아이들에게 열린 공간과 아름다운 추억을 돌려줄 의무가 있다. ⓒ 김동식
민족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주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특별한 보급프로그램 없이도 가능하다. 정보화 시대에도 공동체 문화와 접목시킬 대안을 우리 사회가 찾아 나설 때이다. 전래놀이도 응용을 잘하면 새로운 놀이로 얼마든지 재창조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려서도 안 된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다'는 식의 무조건적 집착은 위험하다. 놀이는 시대와 환경을 따라간다. 원형을 고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외래놀이 및 상업에 물든 놀이가 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진단이 필요하다.

제주교육박물관을 둘러보는 동안 앞서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언제 저렇게 훌쩍 커버렸을까. 도심 속에 갇혀 지내는 아이들에게 이번 설 명절에는 세뱃돈보다 값진 것을 챙겨줘야 할 것 같다. 함께 어린 철부지 소년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동구 밖까지 뜀박질이나 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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