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는 걸어서 출근합니다. 건강을 위해 일부러 걷기도 한다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저에겐 차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제 차를 가져 본 적이 없고 아내에게는 결혼하기 전부터 있던 10년 넘은 '엑센트'가 있습니다. 우리는 맞벌이 부부인지라 아침에 아내는 저보다 먼저 집을 나서 엑센트를 운전하여 이제 갓 돌이 지난 딸 지운이를 처남댁에 데려다주고 출근합니다.
저는 아들 원재를 어린이집 차에 태워준 다음 걸어서 출근합니다. 회사는 걸어서 25분 정도 걸립니다. 어떨 땐 시계로 재면서 빠른 걸음으로 시간을 단축하는 재미도 참 괜찮지요.
그리고 저는 도시락을 갖고 다닙니다. 점심 값 절약하자고 하는 것도 있지만 오늘은 무얼 먹을까 하는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지요. 뭐 도시락 반찬이라야 별난 것 없고 아침에 먹던 것 그대로 도시락에 담기만 하면 그만이죠. 가끔 질리지 않게 밥 위에다 계란프라이도 하나 얹고요.
이 도시락은 '쌕'이라고 하는 배낭에 넣고 다닙니다. 그 배낭은 가끔 도시락 외에 책이나 서류 같은 것들로 조금 무거워질 때도 있는데 그 땐 아예 양 어깨에 짊어지고 걷습니다. 몇 개월 전까지 아침 출근길, 연동 신시가지에서 신제주 국민은행 근처로 양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걷는 사람을 보셨다면, 그 사람이 바로 저일 겁니다.
그런데 이 쌕이라는 것이 서류나 책 같은 것들은 그나마 괜찮은데 도시락 가방으로 하기에는 용도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점심시간 도시락을 꺼내면 반찬이 한쪽으로 쏠려 영 모양이 아니고 어쩌다 김치를 갖고 가는 날에는 김치 국물이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했으니까요. 물론 반찬통이 밀폐가 잘 안되는 탓도 있었고요.(이 문제는 나중에 아내와 시장에서 꼼꼼히 밀폐가 잘 되는 보온도시락과 반찬통을 사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도시락통을 바꾸면서 같이 가방도 바꿀까 했는데 뭐 제가 느끼기에 큰 불편은 없어 관뒀습니다. 또 도시락과 서류를 같이 넣고 다닐만한 가방을 찾는 것이 귀찮기도 했고요. 제 걸음걸이에 맞춰서 도시락이 쌕 안에서 흔들리는 것이 약간 신경 쓰이는 일이긴 하지만요.
"안 쓰는 가방 있는데 줄까?"
그런데 가방이 새로 생기면서 이런 신경 쓰이는 일이 일시에 해결되더군요.
몇 개월 전 서울에 출장갈 일이 생겼습니다. 몇 개의 서류를 챙겨야 했고 평소와 같이 쌕에 그것을 넣었습니다. 단정히 양복을 위아래 갖춰 입고 오른쪽 어깨에 쌕을 메고 서울행 비행기에 오른 거죠.
모처럼 서울 가는 김에 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공항에 마중 나오라고 했고요. 친구는 흔쾌히 좋다고 하며 저녁에 술 한 잔 하자고 하더군요. 참고로 그 친구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보다는 시간과 돈이 훨씬 많고요. 무엇보다 저와 아주 친합니다.
친구 덕에 김포공항부터 서울 시내까지 일을 봐야 할 곳도 아주 편하게 다니고 참 좋더군요. 일을 다 마친 후 친구와 저는 저녁을 먹으며 술 한 잔 하기 시작했습니다. 흉허물 없이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가 제 가방을 보더니 한 마디를 하더군요.
"너 이 가방 들고 다니니?"
"응 뭐 어때? 되게 편해…."
저도 무심코 친구의 말에 답했습니다.
"내가 안 쓰는 가방 있는데 줄까?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어깨에 메면 좋을 것 같은데…."
친구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제가 괜히 자존심 상할까봐 조심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응 그래 줘… 고맙게 쓸 게, 어디 있는데…?"
짝퉁이건 명품이건 도시락 가방으로 딱이네!
그래서 제 가방이 쌕에서 크로스 백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가방을 바꾸니 참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오른쪽 어깨에 메거나 크로스로 메어도 도시락이 흔들리지 않고 항상 제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또 전에 들고 다니던 쌕보다는 왠지 모르게 폼이 나는 것 같았고요. 특히 양복 입을 때는 제 스스로도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렇게 그 가방을 열심히 메고 다니는데 주위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진짜니?"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XX비통'이라는 명품가방과 똑같이 생겼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뒤에는 "짝퉁이겠지…" 했고요.
그러고 보니 하나에 몇 십 만원, 어떤 거는 몇 백 만원까지 한다는 'XX비통'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이거 진짜니?" 하고 물어 볼 수도 없고 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도 처음에만 관심을 가졌지 두 번 다시 물어보지 않더군요.
저도 그냥 "응, 짝퉁이야" 했고요. 뭐 도시락 넣고 다니는데 명품인지 짝퉁인지 가려봐야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명품에는 도시락 넣고 다니면 안 되니?"
그 가방을 준 친구가 한 달 전쯤에 제주도에 볼일이 있다고 내려 왔습니다. 그날 저녁 회사 근처 신제주에서 그 친구와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굴전에 막걸리를 마시는데 참 좋더군요. 쭈욱 시원하게 한 사발 들이킨 다음 살이 통통하게 오른 굴전을 먹으니 제법 취기도 오르더군요.
친구가 한 때는 자기 가방이었던 제 가방을 보며 한 마디 하더군요.
"너 그 가방 들고 다니는구나."
"응 참 좋아. 도시락 넣고 다니기에 참 딱이야."
저는 친구의 물음에 친절하게 가방을 열고 도시락이 담긴 모습까지 보여줬습니다.
"야! 그거 진짜야."
친구가 막걸리를 마시다 내려놓으며 한 마디 합니다.
"그럼 진짜 XX비통이야?"
친구는 제 물음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런데 순간 친구가 가방이 진짜라고 알려준 이유가 제가 도시락을 넣고 다녀서인가 궁금해졌습니다.
"명품가방에는 도시락을 넣고 다니면 안 되는 거였니?"
제가 이렇게 묻자 친구는 대답 대신 막걸리 잔을 제 잔에 부딪히며 씨익 웃었습니다.
다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는데 가방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닙니다. 얘기 도중에 막걸리 집 바닥에 두었던 가방을 살며시 집어 의자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딱히 도시락 말고 넣을 것은 가끔 서류나 책 따윈데 그렇다고 돈다발을 넣고 다닐 수도 없고 말이죠.
친구에게 진짜라는 얘기를 듣고 며칠간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도시락 가방을 하나 새로 살까도 했고, 명품을 떡하니 나에게 준 친구는 정말 좋은 친구다, 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러다 그냥 평소대로 씩씩하게 도시락을 넣고 다니기로 했습니다. 새로 도시락 가방을 사 봤자 남는 가방의 용도도 딱히 마땅치 않았고요. 무엇보다 도시락을 넣고 다니기 위한 맞춤형가방은 이것만큼 적당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요.
또 만일 친구가 어느 날 저에게 "사실은 그거 짝퉁이야" 해도 서운할 거 하나 없습니다. 설령 짝퉁이었더라도 제 가방에 대해 신경을 써 주는 친구는 그리 흔치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