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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개발한 축정항(나로도 포구)
일제강점기 개발한 축정항(나로도 포구) ⓒ 김준
나로도 포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건축물, 당시 건물 주인은 일본인으로 잡화점을 운영했다.
나로도 포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건축물, 당시 건물 주인은 일본인으로 잡화점을 운영했다. ⓒ 김준

삼치,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조선사람 먹기 아깝다"

일제강점기 이곳 나로도 포구의 상권도 일본인들이 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곳에는 즐비했던 일본식 이층집과 가공공장들은 사라지고 유일하게 일본식 건물 한 채가 지붕만 바뀐 채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와다'라는 일본인이 거주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 집은 수협 옆 포구 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당시 그 일본인은 어구를 비롯해 잡화를 판매했으며, 식량 배급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한일합방 무렵 우리나라 해역에서 나는 활어를 실어 나르기 위해 일본의 어항축조기술자들이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다 나로도를 대상지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들이 처음에는 지금 나로도항 반대쪽 창포 쪽에 머물려 현지조사를 하던 중 지금의 축정마을 포구를 보고서 바로 어항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해방이 될 때까지 전국에서 잡힌 생선들이 이곳 축정항에 모아져 일본으로 실어갔다. 당시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 뱃사람 중에 '축정을 모르면 뱃사람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광주일보> 1982. 1. 30 참조). 이곳 축정마을은 한때 일본인 500여 명이 거주할 정도였으며, 1932년에 상수도 시설과 자가발전 시설을 갖췄을 정도였다. 실제로 나로도에 전기가 공급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일제강점기 편찬한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고흥 일대의 고기잡이는 수조망(手繰網), 궁망(弓網), 어전(魚箭)과 외줄낚시를 이용했다. 수조망과 궁망은 조류를 이용해 자루그물을 펼쳐 고기를 잡는 것으로 배를 가지고 자루그물을 이동하는 안강망의 원조쯤 되는 고기잡이 방법이며, 어전은 죽방렴이나 석방렴(독살) 등을 말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잡은 생선들로는 새우, 조기, 갈치, 민어, 가오리, 준치, 가자미, 농어 등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삼치가 "조선 사람 먹기 아깝다"며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 실어갔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나로도 인근에서는 삼치잡이가 성해 가을이면 수백 척의 배들이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고, 나로도 출신의 학생들은 '교복 단추를 금으로 하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 삼치잡이로 재미를 톡톡히 보던 나로도 항은 어청도, 흑산도, 청산도, 성산포, 거문도 등 10개의 포구와 함께 1966년에는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되었다. 당시 어업전진기지란 급수시설과 급유시설, 공동창고, 어업 무선국이 설치되고, 어획물을 처리·유통할 수 있는 가공시설 등 어업에 필요한 제반 시설을 갖추고 있는 다목적 어항을 말한다.

ⓒ 김준
ⓒ 김준
ⓒ 김준

뱃사람들 하나둘 섬을 떠나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 선박은 물론 그물도 큰 전환을 겪는다. 대부분 어선들이 대형화되고 동력선으로 전환되었고, 그물도 면사에서 나일론으로 바뀌면서 연근해 어업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육로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나로도 축정항을 이용하던 선박들은 육상소비지와 가까운 여수, 목포, 심지어는 부산항을 이용하면서 나로도는 경유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번성했던 나로도 축정항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나로도 수협은 고흥군 수협에 흡수되고 지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1980년대 초반 나로도 지소의 조합원 수는 745명이며 이중 근해 안강망 어업을 하는 조합원이 31명에 36척의 선박을, 연안 안강망 어업을 하는 조합원이 16명에 16척의 선박을, 유자망이 75명에 75척이었다.

"우리들이 안강망 구신들이여 우리들이 59년생 마흔 일곱 살 밖에 안 묵었어."
"안강망 목포로 여수로 여기도 많았어. 인천도 많았고. 그것이 동지나 남지나 제주에서 열 몇 시간 두들고 나가."
"바다하고 하늘하고 갈매기들이나 보고, 노상 잡는 것은 갈치제."

축정마을의 김평록씨는 열일곱에 안강망 배를 타고 팔도를 돌아다녔는데, 특히 위도와 흑산도에 갔을 때 그곳에 술집들이 즐비하니 무법천지였다고 한다. 고기도 잡히지 않고 정권이 바뀌면서 정화작업이네 뭐네 하면서, 맘대로 할 수 있었던 고기잡이도 여러 가지 규제로 어려워지자 남아 있던 술집들도 하나둘 정리하고 떠나기 시작했다. 흑산도처럼 상가가 형성되고 마을로 남아 있는 경우는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지만 나로도 같은 곳에서는 당시의 흔적들을 찾기 어렵다.

사량도와 쑥섬 등 인근 섬을 오가는 연락선
사량도와 쑥섬 등 인근 섬을 오가는 연락선 ⓒ 김준
ⓒ 김준
안강망어업이 한창일 때 고흥에서 제일 부자 마을이 나로도 앞에 쑥섬이었다. 지금은 30여 가구에 50여 명이 살고 있지만 당시에는 500여 명이 거주하고, 가구마다 대부분 안강망 배들을 갖고 있었다. 외지에서 배를 타러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셋방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로도에서 알아줬던 중선배('안강망'을 그곳 사람들은 중선배라고 부른다.) 선장 김씨(64). 20여 년 전 나로도 포구의 정취를 묻는 말에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배 있으면 뭐 할 거요~ 속만 아프제."
"아이고 골치 아프요 그런 소리 하지 마쇼."

점심을 먹고 양지바른 곳 의자에 앉아 햇볕을 즐기던 김씨 자리를 내주며 일어섰다. 삼치잡이가 시원찮아지면서 1980년대 초반까지 나로도의 수십 척의 안강망배들이 포구에 생선을 공급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곳에 다방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곳의 40대 후반에서 50대에 이르는 주민들 중에 안강망 배를 타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당시 돈 있는 사람들은 그걸 종자돈으로 빚을 내서 큰 배를 짓고 갈치잡이에 나섰지만 어디로 갔는지 고기잡이는 시원찮고, 불법어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투자한 돈을 모두 날리고 말았다. 한 때 잘나갔던 지역 선주들은 이후 백수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의 이야기를 해달라는 말에 아픈 기억을 곱씹는 것이 싫었던지 김씨는 담배를 물고 자리에서 떴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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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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