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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느 주부들처럼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큰아이를 깨우고 밥 먹이고 씻기고 옷을 입혀 아홉 시에 어린이집을 보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엄마 갔다 올게요"? "명진아 안녕"! 하고 동생한테 인사까지 하며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들을 보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답니다.

부랴부랴 청소를 끝내고 여유가 생기니 따끈한 커피 한 잔 생각이 났습니다. 요 며칠 날씨가 따뜻해 벌써 봄이 오려나 했더니 아직은 겨울아저씨가 물러날 생각이 없나 봅니다.

커피를 마시며 앞 베란다를 내다보니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습니다. 수북이 쌓인 눈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니 옛 어린시절 언니 나 동생과 함께 보냈던 크리스마스가 생각납니다.

어린 시절 저희 집은 무척이나 가난했습니다. 아버지께선 우리 가족을 위해 항상 객지에서 공사장 일을 하셨고 집에 오시는 날은 고작 일 년에 한두 번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농사지으며 자식들 뒷바라지까지 하셔야 했던 엄마의 모습은 항상 지치고 힘들어 보였습니다. 수돗물도 나오지 않았던 때라 언니와 저는 물동이를 들고 마을 공동으로 쓰는 샘터로 가서 물을 길었습니다. 또 저녁 해가 질 무렵이면 언니는 큰방, 나는 작은방 이렇게 군불까지 때며 집안일을 거들었습니다.

금불을 때고 불씨가 남으면 고구마와 알밤을 구워 겨울밤 엄마와 함께 맛있게 먹으며 웃음꽃을 피웠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토끼 같은 자식들을 뒤로한 채 객지에서 혼자 외롭게 공사장 일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자식들과 함께한 날들이 별로 없었기에 잘 따르지 않던 우리 때문에 더욱 외로우셨을 겁니다.

그렇게 아버지 머리에는 그동안에 힘들었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하얀 서리로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해마다 느는 주름살과 갈수록 마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마음 한쪽이 시려 옵니다. 앞으로 외로우시지 않게 전화도 자주 드리고 잘해드려야겠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 마을에는 가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아랫마을까지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아 우리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마침 누가 내다버린 큰 화분이 있어서 얼른 주어와 깨끗하게 손질을 하였습니다. 마을 뒤로는 큰 산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톱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산으로 향했습니다.

작은 손으로 나무를 베려니 잘되지 않아 한참 동안 나무와 승강이를 벌이다 간신히 베어 질질 끌며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화분에 벤 나무를 꽂고 흙을 담아 본격적으로 트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색종이를 오려 고리를 만들고 배게 솜으로는 눈을 만들었습니다. 반짝이가 없어 고민하던 중 제가 모아둔 스카치캔디 속 껍데기를 잘라 연결해놓으니 그럴싸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완성되었습니다. 우리 세 자매는 공들여 만든 크리스마스트리여서 그런지 아주 좋아 방방 뛰며 손뼉쳤습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 날 아침 우리는 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모아놓은 십 원짜리 다섯 개가 있어 할 일이 많았던 언니는 집에 있었고 동생과 내가 아랫마을 가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변변한 운동화가 없어 엄마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주신 빨간 구두를 신고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을 신작로를 건너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구두 때문에 전 엉덩방아를 찌며 내려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제 동생이 우스웠는지 배꼽을 잡더군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늘에선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렸고 금세 우리 발목까지 차올랐습니다. 중간쯤 와있는데 동생의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발이 시렵다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자 언니 등에 업혀"하며 달래주었습니다. 저 역시 차가운 구두 때문에 발이 시려 울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꾹 참고 동생을 업은 채 종종걸음으로 간신히 가겟집까지 갔습니다.

캔디 세 개와 알사탕 두 개를 주머니에 넣고 나니 다시 집까지 가야할 길이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동생을 업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어떻게 동생을 업고 집까지 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제가 참 대견스럽네요.

지금은 짧기만 한 거리지만 어린 시절 그 거리가 왜 그리도 천릿길처럼 멀게만 보이던지…….

우리는 그렇게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 나름대로 파티를 열고 예쁘게 꾸며놓은 트리를 뱅글뱅글 돌며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했습니다. 게다가 힘들게 사온 캔디와 알사탕을 맛보니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세 자매는 어린 시절 잊히지 않는 크리스마스를 보냈답니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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