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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7 장 천동비사(天洞秘事)
"반당은 이미 죽었겠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걱정하던 터였다. 헌데 반당이 데리고 갔던 오독공자 남화우가 철혈보에 기어 들어와 떳떳하게 정운학을 내놓으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반당에게 불행한 일이 벌어졌음이 분명했다.
"정당한 승부였소."
실내에는 꽤 많은 인물들이 앉아있었다. 육능풍은 물론 진독수와 독고상천, 그리고 초산의 모습도 보였다. 그 외에도 두 명의 인물들이 더 앉아있었는데 한 인물은 범상치 않게 보였으나 또 한 인물은 얼굴에서도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창백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정당한 승부라…… 상대는 혼자였나?"
육능풍이 잠시 뇌까리다가 도천수에게 물었다.
"물론이오. 그 결투를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 영광일 정도로 멋진 승부였소."
"으… 음…"
옆에서 듣고 있던 진독수가 침음성을 터트렸다. 반당과 승부를 거루어 반당을 죽일 수 있는 자가 과연 중원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 문득 진독수는 얼굴이 창백한 인물을 흘낏 보고는 다시 도천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하검(星河劍)이었나?"
상대가 성하검 섭장천이었느냐고 물은 것이다.
"아니오. 섭노야의 제자 분이셨소."
"강명이란 자겠군. 반당의 시신은?"
지금까지 침울한 표정으로 도천수와 남화우를 노려보고 있던 중년인이 묵직한 어조로 물었다. 선이 굵은 사각 턱을 가진 그는 짧은 수염이었지만 단정하게 다듬은 모습이어서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사내다움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철혈보 네 개의 기둥 중 일편(一鞭)인 무적신편(無敵神鞭) 신철(申鐵)이 바로 그였다. 그의 손에서 비늘모양의 철편(鐵片) 수백 개를 연결해 만들었다는 무적신편이 펼쳐지면 천군만마(千軍萬魔)도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버리게 한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노부가 모시는 분은 비록 자신의 손에 패한 사람이었지만 냉혈도에게 존경의 염을 보이셨소. 예의를 갖추어 천마곡에 있는 독고보주께 보내드렸소."
도천수의 대답에 육능풍과 진독수, 그리고 무적신편 신철은 더욱 어두운 기색을 띠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진정한 승부에서 패한 것이다. 무인으로서 후회 없는 승부를 벌이고 죽은 것이다.
"반당은 죽으면서도 행복했겠군."
육능풍은 탄식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무인으로서, 특히 반당과 같은 무인이라면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 승부를 겨루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 할 사람임을 알고 있는 육능풍으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반노제의 시신을 본 보주는 얼마나 상심했을까?"
진독수 역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현재 천마곡에 있는 보주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일시적인 울분에 충동적으로 움직일 사람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걸렸다.
"그 자가 와 있는 것이오?"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던 독고상천이 차갑게 물었다. 자신이 나설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물론이네."
도천수는 독고상천을 보며 역시 딱딱하게 대답했다. 도천수는 지금 자신의 처지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러 이곳에 들어왔는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목적은 아무런 말썽 없이 정운학을 데려가는 일이다. 상대들을 충동질하면 안 된다. 그는 육능풍을 비롯, 좌중을 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철혈보와 본교의 일은 철혈보에서 먼저 시작했소. 피는 피로 갚는 것이 무림의 철칙이오. 한번씩 주고받은 셈이오. 우리는 이쯤에서 이 사건을 해결 짓고 싶소."
도천수는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비록 호굴에 들어와 있지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내심을 짐작할 수 없는 눈빛으로 유심히 도천수와 남화우를 지켜보던 창백한 안색의 인물이 냉소를 쳤다.
"훗… 지금까지 본 보는 적과 타협한 적이 없다. 더구나 도천수 당신은 마치 본 보를 봐주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그의 말은 분명 좌중을 충동질하는 말이었다. 도천수는 그 인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여후량(呂厚亮)…! 철혈보의 모든 정보를 쥐고 완벽한 계책을 마련한다는 인물….)
바로 철혈보 은영전(隱影殿)의 전주인 여후량이었다. 그가 왜 좌중을 충동질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기세에 밀리면 안 되었다.
"그것은 귀하가 듣기 나름… 반드시 피를 보아야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소. 다만 결정은 신중히 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요."
"도천수 당신은 스스로의 처지를 모르는군."
그의 말뜻은 명백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도천수와 남화우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협박하는 것치고는 아주 유치하군. 철혈보의 은영전주가 이렇게 편협한 사람일 줄이야…. 그 정도 각오하지 않고 이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시오?"
전쟁을 함에 있어서도 사신만큼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호오… 충성심이 대단하군. 승부라면 천하제일이라는 도천수 당신이 마지막 승부를 그 자에게 건 것인가? 그러고 보니 더욱 그 자를 만나보고 싶은걸…?"
여후량이 빈정거렸다.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창백한 얼굴에서 표정의 변화도 없이 빈정거리는 소리는 확실히 상대가 더 이상 참지 못할 정도로 불쾌감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도천수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이미 도박장에서 반평생을 지낸 사람이다. 사람의 심리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노련한 도천수도 지금 마주하고 있는 여후량의 내심을 알 수 없었다. 협상에 있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지금 여후량의 태도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 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말은 한 판 붙자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아주 명백하게 이 협상을 깨려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주의 의도가 철혈보의 결정이오?"
도천수는 추호도 당당함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육능풍을 비롯하여 진독수, 신철과 독고상천을 쭉 둘러보았다. 결정해 달라는 뜻. 잠시 기다렸지만 더 이상 누구의 입에서도 말이 나오지 않자 그는 남화우를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말이 없음은 긍정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겠다는 의미였다.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갈 때는 마음대로 가지 못하지."
여후량이 다시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헌데 그 때였다. 육능풍이 젖혔던 상체를 일으키며 여후량에게 말했다.
"그만하면 되었네."
언제나 능글거리며 웃는 육능풍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히자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위엄이 되살아났다. 그는 시선을 도천수에게 돌렸다.
"잠시 기다려 주겠나? 우리도 시간이 필요하군."
"오래 기다릴 수는 없소."
여전히 도천수의 말투는 빡빡했다. 육능풍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한두 시진 후면 자네는 자네의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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