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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부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많이 빠지면서 나도 모르게 '대머리' 반열에 올랐죠. 주위의 시선들이 부담스러워지면서 가발을 생각했고, 고민 끝에 구입해서 착용했습니다. 그렇게 가발과의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 '나도 대머리요'. 가발을 벗으며 활짝 웃는 최 명장, 더 이상 대머리의 비애는 없다고 말한다.
ⓒ 전득렬
기능인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명장'에 오른 최원희씨(50, 대구 달서구 '최원프리모'). 그는 20여 년 전 '대머리' '빛나리'라는 친구들의 '농담 섞인 진담'에 상처를 받아 남 몰래 가발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네에서 이용소를 운영하던 최 명장은 가발 착용이 여간 어색하지 않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철저하게 감추고 숨겨야 할 비밀, 대머리

최원희씨는 말했다. 처음 가발을 썼을 때 감정은 참으로 묘했다. 모자를 쓴 것 같기도 하고, 머리 위에 무언가를 얹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거울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발이라는 표시가 너무 많이 났다. 남아 있는 본래 머리카락과 그 위에 착용한 가발 머리카락이 맞지 않아 늘 삐딱하게 돌아갔다. 가르마가 흐트러지기 일쑤였으며,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가발이 벗겨질까봐 늘 불안했다.

"대머리의 '슬픈 애환'은 대머리가 아닌 사람은 모릅니다. 정말이지 떨어지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죠. 남들이 흔히 뽑는 새치와 흰 머리카락도 우리는 절대 뽑지 않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생명이기 때문이죠. 머리 감을 때도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래도 탈모가 지속되면서 결국 대머리가 됐을 때는 깊은 절망감에 빠졌죠."

탈모증으로 고민하다 자살을 시도한 한 고교생의 이야기가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하는 최원희 명장. 양복을 입고도 모자를 써야만 했던 슬픈 고뇌와 한숨을 머리숱이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대머리에게 '대머리'는 그냥 부끄러운 한 부분이 아니라 '수치심'이라고 말하는 최 명장. 그는 "철저하게 감추고 숨겨야 할 비밀, 아내도 모르는 비밀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발각' 됐다고 생각해 보면, '대머리의 비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 "'대머리'라는 단어 자체도 상대방 인격을 비하하는 말이기 때문에 '탈모증'이라는 말로 대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머리를 밑천 삼아 20여년 가발 연구를 하다

▲ 군 이발병, 기능올림픽금메달 그리고 명장까지 3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 전득렬
젊은 시절부터 대머리였던 최 명장은 비밀스럽게 쓰던 가발의 불편한 부분들을 하나하나 기록해 나갔다. 그리고 직접 수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발의 특성과 제작법을 나름대로 익혔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지나고, 또 세월을 보내면서 직접 가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머리를 밑천 삼아 가발에 정성을 쏟은 지 20여년. 고생한 보람이 있는지 그에게 '발명특허'와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한 개의 가발 완제품이 만들어지는 기간은 약 20일 정도. 두상에 맞는 본을 뜬 후 망채에 인모(人毛)를 일일이 묶고 심는 '수(手)작업'(위밍묶음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 가르마 부분의 머리카락이 생머리처럼 꼿꼿하게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이중으로 망채를 만드는 특수 공법도 동원된다. 10만 번 이상의 손길이 가야 가발 한 개가 만들어진다. 개개인의 두상에 맞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가발이기 때문에 최 명장은 가발을 '예술품'이며 '가모'라고 말한다.

"망채에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심어 가발을 만들죠. 착용하기 전까지는 가발이지만, 내 얼굴형과 두상에 맞는 가발을 만들어 착용하면 가모가 되고, 본인의 헤어스타일에 맞게 만들어져 자연스럽게 착용하게 되면 '진모'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지요."

최 명장은 "가모는 무엇보다 본인의 얼굴형과 두상에 맞는 자연스러움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군 이발병, 기능올림픽 금메달, 그리고 명장까지

▲ 머리형에 맞는 본을 뜬 후 가발이 만들어지기 까지는 20여일이 걸린다.
ⓒ 전득렬
최 명장은 참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어려운 시절의 가정환경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군 이발병에 지원하면 따뜻한 밥을 세 끼 얻어먹을 수 있다'는 삼촌의 말 한마디에 이발을 배워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4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군 사령관(중장)의 전속 이발사가 되었다.

손재주가 있었는지 전역 후 최 명장은 이용사는 물론 미용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그 후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지방대회에 출전해 금메달을 수상했고, 메달 수상 후에도 더욱 박차를 가해 대한민국 '기능장'에 도전했다. 이어서 한국산업인력공단과 노동부가 선정하는 '명장'에 까지 올랐다.

70년대 후반에 이용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지난 2002년 10월 '대한민국 명장'이 되기까지는 3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최 명장은 "이 모든 것이 대머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대머리였기에 가발을 만들었고, 그 아이디어가 빛을 발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1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국제기능올림픽 세계대회 때. 이용업 종사자들이 급격하게 줄 무렵인 당시, 후진 양성을 위해 사비를 털어 밤낮 없이 합숙훈련을 하며 기술교육을 지원했다. 결국 국제기능올림픽 전국대회에서 이용부문 금메달 획득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교도소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남자

최 명장은 5년째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이용자격증 획득을 위한 기술교육을 하고 있다. 회색빛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교도소. 겹겹이 닫혀 있는 그 육중한 철문도 그가 나타나면 자동으로 열린다. 재소자들이 1년 과정의 이용기술 프로그램을 통해 이용이론과 실습을 받은 뒤 국가 자격시험에 응시한다고 한다.

교도소 첫 교육 때는 항상 분위기가 냉랭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성교육 등 3개월만 지나면 차가운 눈빛이 따뜻해지고 배움의 눈길로 바뀐다고. 지난 4년간 43명의 재소자가 이용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100% 전원 합격이라는 쾌거를 올렸다고 최 명장은 말했다.

배움의 길, 끝없는 노력과 봉사

최 명장은 그동안 못 배운 설움도 해결했다. 중학 중퇴가 최종 학력이었던 그는 만학으로 서울직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국립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직 과정까지 이수했다. 그리고 양로원을 찾아 무료 이용 봉사활동을 하고 후진 양성과 재소자 교육을 해왔다.

▲ 무던하게 노력하면 행운은 저절로 찾아온다고 최 명장은 말한다.
ⓒ 전득렬
가장 큰 보람으로 남는 일은 2급 소아마비 장애인을 국제기능올림픽 전국대회에 출전시켜 은메달을 따도록 지도한 일. 일반인도 도전하기 힘들다는 기능경기대회에서 메달을 수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6급 장애인 판정을 받은 최 명장 본인도 장애인이기에 더 큰 보람으로 남는다고.

"무던하게 노력하면 행운은 저절로 온다"고 최 명장은 말한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그. 최근 영화배우 차승원씨의 영화소품용 가발을 만들어준 최 명장은 여성용 패션 가발, 수염 가발, 무모증을 위한 가발 등에도 신경을 쏟으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빛나는 대머리'의 약점을 극복하고 '명장'이 된 그는 오늘도 수십 만개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세며 '희망의 가발'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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