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은 크게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아시아지역과 서쪽의 유럽 지역으로 나뉜다. 유럽 지역은 또 다시 중간의 금각만을 경계로 남쪽의 구시가지 지역과 북쪽의 갈라타 지역으로 나뉜다.
아시아 지역은 대부분이 주거지역이고 서쪽의 유럽지역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이다. 유럽지역에서도 유적지가 모여 있는 곳은 구시가지인 술탄 아흐메트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교회가 모여 있다. 그리고 갈라타 지역인 북쪽은 최대의 번화가인 탁심 거리를 비롯한 상업지역이다.
1월 1일에 뜨는 해나 2일에 뜨는 해는 같을 지은데 '해돋이'라 하여 소란을 피우듯이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시아니 유럽이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이 이름들이 그리 만만히 보이지 않은 것은 이 해협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뒤흔든 몇 가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을 얘기하려면 메흐메드 2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배를 타고 흑해 쪽인 위로 올라가니 왼쪽 편에 '유럽 성'이라는 의미의 '루멜리 히사르'가 보인다. 이게 바로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위해 세운 성이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사건'은 세계사의 대단한 사건 중의 하나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사건을 배경으로 비잔티움의 책과 학풍이 서유럽으로 가게 되었고 이는 앞으로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의 밑바탕이 된다. 그러나 이건 한참 뒤의 일이다.
이 성의 공략은 한 때 술과 남녀를 불문한 성애에 미쳐있었고 성품이 제멋대로인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이 성을 쌓으면서 시작된다. 오른쪽은 '아시아 성'이라는 의미의 '아나돌루 히사르'가 보인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무역의 중심지같은 항구도시였다. 여기에 서구의 통상국가인 제노바와 베니치아와 대상을 떠올리는 동양의 아랍 국가들과 치열한 상업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유목민족인 오스만 투르크는 본질적으로 유목민이어서 상업에 능수능란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서툰 분야인 무역을 대신 해주는 콘스탄티노플의 존재는 어느 정도는 묵인해 주고 있었는데 고대 알렉산더같은 영웅에 유독 관심이 많은 메흐메드 2세가 이 성을 쌓으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은 나에게 루멜리 성이 눈앞에 펼쳐지니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흥미로웠다. 세상일이란 그저 관심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 성을 하늘에서 보면 메흐메드 2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곳을 지나다니는 해적을 통제할 목적으로 만든다고 했지만 라틴 인들은 자신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흑해 연안의 여러 도시들과 통상에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서구상인과 자신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거리가 660m의 가장 좁은 해협인 이곳에 1452년에 불과 4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역삼각형의 형태를 한 루멜리 성은 전장 250m, 높이 15m, 폭 3m인 성벽을 두르고 있다. 큼직한 세 개의 탑과 아홉 개의 작을 탑을 배치하고 해협에 접한 큰 탑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우르반'의 대포가 턱 걸터앉았다. 이 대포 역시 서양 전쟁사의 한 획을 그었다.
앞으로 이 지역을 여행할 계획이 있으신 분은 이 성을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란다. 북경의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카오스의 이론'이 여기에서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