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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눈과 파란 하늘이 가득한 지리산 칠선봉도 넘어 갔다.
흰눈과 파란 하늘이 가득한 지리산 칠선봉도 넘어 갔다. ⓒ 서종규
지리산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어라고 할까? 웅장함도 아니고, 수려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대 가벼운 산도 아니고, 무어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말이 잘 생각나지 않는 지리산. 세석대피소에서 만난 심상환(서울ㆍ58세)씨는 지리산을 오르면 무거운 맛이 남고, 백두대간의 큰 품에 안기는 것 같다고 한다.

"1월 30일 새벽부터 2박2일로 혼자 지리산 종주를 했어요. 그때 눈이 많이 와서 너무 좋았어요. 나무 위에까지 가득 쌓여 있어서 온통 눈세상이었죠. 지난주에 다시 눈이 많이 왔다는 뉴스를 듣고, 이렇게 친구와 같이 2박3일간의 지리산 종주를 하고 있어요.

지리산을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네요. 웅장함? 웅장함은 아닌 것 같고, 설악산처럼 수려하지는 않지만 늘 마음이 끌리는 산이죠. 저 갈래갈래 뻗은 지리산 줄기와 능선만큼이나 무거운 맛이 남아요. 수많은 능선으로 뻗어나가는 지리산의 줄기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백두대간의 큰 품에 안기는 것 같죠."

봄의 문턱에서 지리산 눈길을 밟는 즐거움
봄의 문턱에서 지리산 눈길을 밟는 즐거움 ⓒ 서종규
그렇다. 지리산은 깊음에 빠져드는 산, 시어머니 같은 큰 품에 포근하게 안기는 산인 것 같다. 산을 좋아하는 ‘풀꽃카페 토요산행팀’ 20명은 2월 16일부터 2박3일간 지리산 종주에 들어갔다. 60대 3명을 포함하여 50대 6명, 40대 7명, 20-30대 4명의 연령에 여성이 5명이나 되었다.

2월 16일 아침 8시 광주를 출발하여, 9시30분에 구례 산동면 당동마을에 도착했다. 산 아래는 완연한 봄이었다. 어제 내린 비가 그친 뒤의 계곡 물소리는 즐거운 울림으로 퍼졌고, 이슬을 머금은 버들개지는 이제 통통하게 자라 봄을 전하고 있었다. 고로쇠나무 수액을 받는 호스에 물방울들이 흘러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겨울 지리산 종주라는 중압감 때문인지 모두 배낭이 컸다. 그만큼 첫 발길부터 부담스러웠다. 당동마을에서 성삼재까지는 3.3km이다. 무게에 눌린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산 아래에 봄 풍경과는 반대로 성삼재 부근부터 눈길이 시작되었다. 소나무 잎 하나하나에 얼음꽃이 피어 있었다.

소나무에 내린 비가 얼음이 되었네요.
소나무에 내린 비가 얼음이 되었네요. ⓒ 서종규
삼한시대 진한의 대군에 쫓기던 마한 왕이 지리산 심원계곡에 피난을 와서 왕궁을 세웠는데, 궁궐이 있던 곳이 달궁이고,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세워 지키게 했다고 하여 팔랑치이고, 서쪽 능선에 정 장군을 세워 지키게 했다 하여 정령치, 동쪽은 황 장군이 맡았다 하여 황영재, 남쪽 능선은 가장 중요하여 세 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했다는 성삼재.

우리는 이 성삼재에서 점심을 먹었다. 성삼재는 늘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지만 길이 얼어 있어서 몇 대의 차량만 보였다. 성삼재에서 구례를 내려다보는 맛이 대단하다. 특히 구름이라도 한 두름 흘러 올라오면 잡을 것 같은 기분에 손을 내뻗어 보기도 한다.

구름이라도 한 두름 올라오면 잡을 것 같은 기분에 손을 내 뻗어보기도 한다.
구름이라도 한 두름 올라오면 잡을 것 같은 기분에 손을 내 뻗어보기도 한다. ⓒ 서종규
성삼재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길은 눈과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아니 천왕봉에 이르는 길이 모두 눈과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길뿐만 아니라 지리산 능선 전체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하얀 눈길을 걷는 겨울 산행은 그만큼 힘들면서도 내면으로 파고드는 기쁨이 하얀 눈과 같다.

차라리 겨울 지리산 종주가 더 편할지도 모른다. 여름 지리산 종주는 그 무더위에 싸우면서, 수많은 바위와 돌을 밟고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간다. 그런데 겨울 지리산 종주는 눈들이 다져져 있어서 꼭 흙을 밟는 것 같아 무릎의 충격이 훨씬 줄어든다.

지리산은 그 추운 날씨에도 얼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이 있어서 편하다(뱀사골 대피소 샘물).
지리산은 그 추운 날씨에도 얼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이 있어서 편하다(뱀사골 대피소 샘물). ⓒ 서종규
겨울 지리산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힘들기는 하여도 불안하지는 않다. 그것은 바로 겨울 산행에 부담을 덜어 주는 샘이 많기 때문이다. 그 추운 날씨에도 얼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이 있어서 편하다. 성삼재나 노고단 대피소에서 물을 얻을 수 있고, 임걸령에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다.

그리고 뱀사골 대피소, 연하천 대피소의 샘물이 끊이지 않는다. 벽소령 대피소의 샘물이 좀 부족하지만 세석 대피소의 샘물이 또 풍부하다. 장터목 대피소의 샘물이 부족하고, 천왕봉 천왕샘은 바로 남강의 발원지가 되는데 겨울에도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노고단, 임걸령, 노루목, 반야봉 옆을 지나 삼도봉을 넘어 550여 계단을 내려가니 우리의 첫날 일정인 12.1km를 마감하는 뱀사골 대피소가 나타났다. 뱀사골 대피소는 화개재에서 약 200m 아래로 내려가는데 길은 거의 얼어 있었다. 대피소 안에 난로를 피웠지만 밤에 영하 14도까지 내려가는 날씨 때문에 추워서 잠을 설친 사람들이 많았다.

산행 중 빙벽을 만나니 어찌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산행 중 빙벽을 만나니 어찌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 서종규
둘째 날(2월 17일), 아침 7시 45분에 출발하였다. 영하 14도, 몰아치는 강풍으로 체감온도는 훨씬 더 내려갔다. 그런데 푸른 하늘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투명한 얼음 같았다. 첫날 구름이 많았던 날씨에 비하여 너무 맑았다. 차가운 바람을 막으며 걷는 마음을 파란 하늘이 위로하고 있었다.

둘째 날의 길이는 14.1km이다. 세 끼의 식사로 더 가벼워야 할 배낭인데 토끼봉 오르는 처음부터 오히려 더 무겁다. 하루종일 산길을 걷는다. 그것도 눈길과 얼음길을 걸어야 한다.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나 할까. 엄마를 찾듯 지리산의 품에 안기어 흐르는 대로 움직여야 할까.

벽소령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지리산 대피소의 취사장들이 깨끗이 단장되어 있었다. 지난 여름에만 하여도 나무로 되어 있던 취사장들이 모두 강철로 되어 있었다. 우리 팀은 아침에 보온 도시락에 싸 온 밥을 꺼내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4개 팀으로 편성한 팀 중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다.

죽은 구상나무가 있는 지리산은 태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죽은 구상나무가 있는 지리산은 태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 ⓒ 서종규
지리산엔 군데군데 구상나무가 죽은 고사목이 우뚝 솟아 있다. 태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저 멀리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줄기들, 줄기들 사이에 깃든 기운, 파란 하늘 때문에 멀리 덕유산의 봉우리들도 보였다. 지리산의 깊음에 더욱 빠져들었다.

조금 일찍 오후 4시30분에 세석 대피소에 도착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을 준비해야 했다. 물이 풍부한 세석 대피소였지만 그래도 100여m를 내려가서 물을 떠 와야 했다. 대부분 그렇지만 산 정상에 있는 대피소에서는 세면뿐만 아니라 양치질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른 저녁을 먹었는데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나는 급하게 카메라들 들고 영신봉으로 뛰어 갔다. 늘 그렇지만 지는 해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하는 감탄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같이 온 일행들과 함께 보지 못함이 아쉬웠다. 반야봉 옆으로 넘어가는 해넘이가 하루의 피곤을 깨끗이 씻어주는 것 같았다.

세석 대피소의 화장실은 세균을 번식시켜 오줌과 똥을 분해하기 때문에 겨울철에도 따뜻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더구나 화장실의 벽이 투명한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세석평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 8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촛대봉에 오르자 붉은 기운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촛대봉에 오르자 붉은 기운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 서종규
셋째 날(2월 18일), 새벽부터 서둘렀다. 천왕봉 일출은 볼 수 없었지만 세석 대피소 위에 있는 촛대봉 일출이라도 보기 위해서이다. 6시30분에 출발했다. 촛대봉에 오르자 붉은 기운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늘 그렇지만 지리산에서 구름 사이에 나타나는 해돋이만 보아도 기쁨이었다. 그래도 지리산의 일출을 볼 수 있는 기쁨.

10시 드디어 천왕봉에 올랐다. 천왕봉의 날씨가 어제보다는 따뜻했다. 바람 한 점이 없었다. 천왕봉 정상에서 거센 바람 때문에 사진 몇 장 찍고 하산해야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바람 한 점 없는 날씨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마음껏 사진을 찍었다. 많은 사람들이 천왕봉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고 또 보고,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감격
보고 또 보고,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감격 ⓒ 서종규
중산리까지 총 40여 km의 지리산 종주, 수려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깊음으로 빠져드는 산, 어머니와 같은 포근함으로 안기는 산, 끝없이 이어진 능선과 능선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뻗어오는 기운,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지리산을 찾을지 모르겠지만 찾으면 찾을수록 빠져드는 지리산.

2월의 지리산 눈길 산행은 또 다른 맛이 있다. 산 아래는 봄을 재촉하는 물소리며, 버들개지며, 봄꽃들이 꿈틀대기 시작하는데, 산 능선에는 몇 센티미터씩 쌓인 눈이 그대로 겨울인 것이다. 봄의 문턱에서 눈길을 밟는 즐거움, 봄과 겨울의 이색적인 만남, 바로 2월 지리산 산행의 즐거움이다.

천왕봉에서 뒤돌아보니, 아 저 먼 지리산 능선을 2박 3일간 걸어서 왔다니!
천왕봉에서 뒤돌아보니, 아 저 먼 지리산 능선을 2박 3일간 걸어서 왔다니! ⓒ 서종규

덧붙이는 글 | 2006.3.1~2006.5.15일까지는 봄철 건조기간에 따른 산불방지기간으로 지리산국립공원 노고단 - 천왕봉 코스 등 주요 등산로가 입산이 통제된답니다(일부 산 아랫부분의 구간 허용). 노고단 - 천왕봉 등 주 능선의 눈이 보통 4월까지도 녹지 않는데, 산불방지기간으로 인한 통제가 너무 빠른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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