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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발집을 운영하며 22년간의 단어 기록을 마침내 영어책으로 만들어 낸 집념의 아버지가 있어 화제다. 대구 달서구에서 '팔공산왕족발'을 운영하는 하원복(44)씨가 그 주인공. 하씨는 초중고생이 반드시 알아야 할 영어단어를 각각 3천자씩 그림으로 그려서 쉽게, 단번에 외울 수 있도록 책을 만들었다. 거기에다 예문과 뜻까지 기록해서 문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한 번만 보아도 쉽게 잊혀 지지 않는 생뚱맞은 삽화로 그려 넣은 게 이 책의 특징이다.

학원 못 보내는 아들 영어 가르치다 책 만들다

▲ 영어단어와 그에 맞는 그림을 일일이 스케치해 그린다. 채색등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 전득렬
"학창시절 영어공부를 너무 못했던 것이 한이 되어 틈날 때마다 단어를 그림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20여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죠.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두 아들놈조차 영어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학원에 보낼 형편은 안 되고 해서 틈틈이 영어를 가르치다 보니 '이거다' 싶어 아예 책을 만들어냈죠."

중3과 고2의 두 아들을 둔 하씨는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흔히 하는 말로 '속에 천불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다른 과목의 성적은 좋은데 유독 영어과목만 점수가 낮은 두 아들에게 '매'를 들어가며 영어를 가르쳤다는 하씨. 하지만 두 아들은 영어단어를 외우고 돌아서면 잊어버릴 정도로 '영어치'였다고 한다.

'자꾸 잊어버리는 병(?)'의 원인을 찾던 하씨는 '영어 단어를 기계적으로 암기하고, 또 단어를 강제로 외우게 하다 보니 자꾸 잊어버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단어를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쇼킹하고 생뚱맞은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 가르쳐 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1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그림을 그려서 가르쳐 준 단어'만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거다' 싶어 하씨는 만사를 제쳐 놓고 22년간의 기록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혼자만 한으로 삼킬 게 아니라 '아들에게 영어책을 선물하고, 영어를 못하는 학생들에게도 영어책을 선물해야겠다'고 큰(?)결심을 했다. 족발배달이 없는 시간 틈틈이 밤낮으로 그림을 그리고 영어단어를 정리한 결과 꼬박 1년만에 중고교 단어 3천자를 각각 그림으로 표현해 영어단어를 외울 수 있도록 책을 만든 것이다.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아버지의 정성 덕분

"시간에 따른 망각의 곡선에 따르면, 사람은 기억을 한 후 이틀 동안 66%를, 1개월이 지나면 79%를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21%는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되풀이해서 반복학습을 하는 것이 기억을 정착시키는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죠. 저는 잊어버리지 않는 21%의 두뇌를 사용해 학습하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영어단어를 그림으로 나타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명사 등 사물을 나타내는 것은 그림으로 가능했지만, 형용사 부사 추상명사 등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순식간에 모든 단어가 그림으로 전광석화처럼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도가 터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기록의 수준을 넘어 아예 영어단어책을 만들기 시작했죠. 영어사전에 있는 어떠한 단어도 그림으로 다 표현되었습니다. 20여년의 기적인지,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정성 덕분인지 '기가 막히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씨는 족발집을 운영하면서 만든 책이고, 생뚱맞은 그림을 그려 만든 책이라 책 이름을 <생뚱족발영어>라 지었다고 한다. 그가 펴낸 족발영어책을 보면 정말 생뚱맞다. 한번 보면 쉽게 잊혀지지 않고 금방 기억이 나는 그림들이 많고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단어도 많다.

▲ 버드나무 가지가 '위로' 올라간 그림. '위로(willow)'는 '버드나무'라는 뜻이다.
ⓒ 전득렬
단어를 생뚱맞은 그림을 표현해 잘 잊혀지지 않아

책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오리는 영어로 'duck(덕)'이라고 한다. 이 단어와 함께 나오는 그림은 '오리가 떡을 머리에 이고 있는 그림'이다. 그림 자체가 오리고, '(덕)떡'이라 바로 외우게 된다.

또 다른 단어를 보자. 버드나무는 영어로 'willow'다. 버드나무는 원래 가지가 아래로 축 처져 있는 나무인데 강풍으로 버드나무가지들이 '위로(willow)' 올라가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가지가 '위로' 올라간 '버드나무', 바로 단어와 내용이 연결된다.

'때때로, 이따금'이라는 뜻을 가진 'occasionally'는 단어를 보자. '때때로'를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가능하다. 이 단어는 학교 운동회 때 학부형이 파전 등 '전을 억 개나 부쳐 놓아 아이들이 때때로 이따금 와서 먹는다'는 내용의 그림을 그렸다. '억개의전(occasionally)을' '아이들이 때때로 와서 먹는다'로 외우면 되는 식이다.

이 책을 본 경북외국어고등학교 영어과 이상진 교사(43, 외국어부장)는 책의 구성에 놀라움을 표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5년간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영어단어를 외우 것이며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부분이라고 털어 놓았다.

"사실 이런 책은 영어교사인 우리가 만들어야 할 일입니다. 하원복씨의 '생뚱맞은 족발영어 단어집'을 보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림과 단어를 접목해서 외우도록 했고, 그 뒷 페이지에 그림 중 일부분을 삭제 '컷'을 넣어, 그것만 보고 단어를 떠올리게 한 책의 구성은 아주 복습까지 할 수 있도록 한 것 같습니다."

다리 불편한 5급 장애, 족발 배달하며 틈틈이 영어책 집필

▲ 22년간 족발을 삶고 썰고 배달하며 영어단어를 그림으로 기록했다
ⓒ 전득렬
하원복씨의 최종학력은 대학 2년 중퇴. 고교 1학년 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중풍으로 몸져누우면서 그는 졸지에 8남매를 먹여 살려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되었다. 동생들 뒷바라지와 학비조달을 위해 건설현장 일용직부터 새벽신문 돌리기, 엿장수, 구두닦이 등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뭐든지 했다.

어릴 때 한쪽 다리를 다쳐 5급 장애인 그는 '절름발이'라는 놀림을 받으면서 자라야 했다. 그런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씨는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마저 학비 조달을 못해 대학을 중퇴해야 했다.

이후 족발 도매업에 뛰어 들어 돈을 좀 버는가 싶었는데 IMF로 주저앉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좌절조차 행복한 투정이라 생각하는 그는 두 아들과 가족을 위해 다시 족발을 삶고 배달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비바람 속에서 배달을 하면서도 그의 한손에는 늘 영어단어장이 항상 쥐어져 있었다.

족발을 들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떠오르는 단어와 그림을 메모했다. 배달이 없을 때는 늘 영어사전을 펼치며 영어단어를 그림으로 그려 보았다. 그렇게 메모한 20여년의 기록들을 아들과 배달아르바이트생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하원복씨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아르바이트생 대부분이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가지 않거나,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씨는 배달이 없는 시간을 활용해 아이들을 붙잡고 틈틈이 영어공부를 시키고, 단어 시험을 치게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각서를 쓴 아이들만 아르바이트로 채용했습니다. 그리고 배달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그림으로 배우는 영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족발배달을 하며 공부를 했던 아이들이 100여명에 이릅니다."

영어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

▲ 그의 가게 쪽방에는 그동안 기록한 수많은 원고가 빼곡히 쌓여있다.
ⓒ 전득렬
처음에는 아들조차 '단 한번만 써 보고, 읽어 보고, 그려보면 단번에 외워지는 영어공부의 비법'을 설명했을 때 '그런 게 어디 있느냐'는 반문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아르바이트생들도 지인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한다. 모두들 '영어선생님도 아니고, 영어를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또, 대학도 졸업 못한 사람이 어떻게 책을 쓸 수 있냐' 말했지만 그는 '가능성'을 하나하나 실천해왔던 것이다.

하씨는 "영어선생님도 아니고, 영어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이 책을 쓸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영어공부에 흥미 없어 하던 두 아들이 <생뚱족발영어>로 공부해서 이제 영어공부를 잘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영어단어에 대한 집념의 노력이 책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씨는 말한다. 그의 다소 엉뚱하고 생뚱맞은 생각들이 단지 생각에 머물지 않고 책으로 발간돼 감격스럽다고 한다.

하씨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참으로 자랑스럽다'고 족발영어로 공부한 소감을 말했다. 이어 "이 책을 볼 때 마다 늘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의 고생을 덜어드리고 싶다"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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