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칸은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곳
노 대통령이 방문 의사를 밝힌 유수칸은 1882년(메이지 15년)에 설립된 일본 최고(最古)의 전쟁박물관으로서, 현재 약 5천 점의 전쟁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측이 이러한 유물을 전시하는 목적은 과거의 전쟁을 반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유물을 전시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야스쿠니신사 홈페이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메이지 15년에 우리나라 최초·최고(最古)의 군사박물관으로 개관한 유수칸은 그때 그 모습을 잃지 않고 일관해 온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국 영령을 위령하고 현창하는 것이고, 하나는 근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근대국가의 성립을 위해, 우리나라의 자존·자위를 위해, 나아가 세계사적 시각으로 보면 피부색과 관계없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서 피할 수 없었던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전쟁에 귀한 생명을 바친 분들이 영령들이며, 그 영령들의 무훈과 유덕을 현창하고 영령들이 걸어온 근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유수칸의 사명입니다."
이에 따르면, 유수칸이 전쟁 유물을 전시하는 목적은 기본적으로 과거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위 인용문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일본은 과거의 침략전쟁을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서 피할 수 없었던 전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유수칸이라는 박물관을 세웠던 것이다.
"영령들의 무훈과 유덕을 현창"한다는 문구를 보면, 과연 일본이 자신들의 침략 범죄를 조금이라도 반성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수칸에는 일제 침략으로부터 피해 입은 동아시아 국민이 용납하기 어려운 전시물이 하나 있다. 다른 전시품들도 모두 다 그러하겠지만, 일본이 자랑스럽게 전시하고 있는 '여자 정신대의 핏자국으로 얼룩진 일장기'만큼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여자 정신대의 핏자국으로 얼룩진 일장기'
유수칸 박물관은 해당 사진에 '여자 정신대의 피로 얼룩진 일장기'라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사진을 보자. 일장기의 윗부분에 '침심'(沈心)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침심'은 '마음을 가라앉히다' 혹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다'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 여자 정신대의 핏자국으로 얼룩진 일장기에 '침심'이라는 글귀가 쓰인 것과 관련하여, 일본이 기대하는 효과는 다음 4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핏자국'의 이미지는 '비장함'이다. 이는 비장함 속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정신대를 연상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만큼 정신대의 '임무'가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었음을 은연중에 주입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일장기'에 무언가를 썼다는 것은 '애국적 충성'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이는 정신대가 애국심이나 충성심을 갖고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한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정신대가 사실상 강제적으로 동원된 현실이 은폐되는 것이다.
셋째, '침심'의 이미지는 '도덕적 수행'이다. '침심'이라는 글귀로 마음을 달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힘든 생활을 하는 속에서도 정신적 평정을 위해 노력하는 '구도자'의 이미지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정신대의 생활이 과연 그러한 것이었겠는가를 생각하면, 이 역시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유수칸 소개문에 따르면 이 박물관의 목적이 근대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정신대의 생활을 도덕적 구도자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이 과연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넷째, '피'와 '일장기'의 결합은 개인과 국가의 연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피의 또 다른 이미지는 '생명'이다. 피로 얼룩진 일장기는, 개인의 생명과 국가의 운명이 혼연일체가 됨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을 군국주의적 사회통합으로 동원하는 것을 은연중에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는 과거의 침략전쟁이 일본 국민 개개인들의 헌신적인 참여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유수칸 박물관은 근대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일본 측이 유수칸 박물관을 운영하는 목적도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유수칸의 목적은 '군국주의적 메시지' 전달
그런데 한국 대통령이 그곳을 방문해서 어떤 발언을 하는 것으로써 과연 일본인들에게 효과적인 어필을 할 수 있을까? 일본이 박물관을 만든 목적은 방문객들에게 유물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한국 대통령이 유수칸을 방문하여 유물을 관람했다면, 그것으로써 유수칸의 설립 취지가 달성되는 것이다.
설령 그곳에서 한국 대통령이 유수칸의 반역사성을 입으로 언급한다 해도, 그러한 발언은 '어느 특급 손님'의 푸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일본 측이 그러한 발언을 하도록 기회를 줄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그러한 발언을 한다 해도 그것이 한국 대통령의 의도대로 일본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될지도 또한 의문이다.
일본 국민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이따금 방문하여 애국심을 키우던 그 유수칸을 한국 대통령도 방문하였다는 점이다. 한국 대통령이 어떤 의도를 갖고 그곳을 방문하든 간에, 일본 국민은 그 사실을 자신들의 방식대로 인식할 뿐이다. 일본인들은 한국 대통령이 그곳을 방문하였다는 점을 중시할 뿐이지, 한국 대통령이 어떤 의도로 방문하였는가는 중시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5·18 묘지를 방문한다고 하면, 방문 그 자체로써 5·18의 대의에 동의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가 어떤 의도로 그곳을 방문했는지, 그가 그곳에서 옆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부당성 알리려면 부당한 유물을 제거해야
설령 한국 대통령의 비판적 발언이 매스컴을 통해 일본 국민에게 전달된다 하더라도, 정작 일본인들은 한국 대통령의 행동을 '중대한 결례'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어찌됐건 간에 자신들의 조상을 기리는 곳에서 한국 대통령이 비판적 발언을 한다면, 그 내용이 어떠하든 일본 국민으로서는 기분이 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일본 국민을 동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도리어 적으로 돌리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수칸의 부당성을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에서 부당한 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정신대의 핏자국으로 얼룩진 일장기'가 전시되고 있는 것이 부당하다면, 그 부당성을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일장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단지 "저런 것을 전시하면 안 된다"는 발언 정도로는 그 부당성을 철저히 알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그러한 유품들을 제거할 수는 없다.
부당한 곳에 가서 부당한 것을 제거하지 못하고 그냥 감상만 하고 돌아온다면, 그러한 행위 자체가 부당한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단지 몇 마디의 말로 유수칸의 부당성을 알릴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중국정부는 유수칸 같은 곳에 가지 않고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쟁점으로 일본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정부의 접근법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다른 종교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꼭 그 종교의 집회장소에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기 종교의 집회장소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종교의 집회장소를 방문하는 것은, 그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상대방에게 역공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방문 그 자체가 신앙의 표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역이용당할 가능성도
그러므로 노무현 대통령이 진정으로 야스쿠니의 문제점을 알리고자 한다면,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이유로 한·일 정상회담을 거부한다든가 아니면 다른 외교적 압력을 가하든가 해야지, 한국 대통령의 신분으로 야스쿠니신사 안에 직접 들어가는 것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대통령이 신사 안에서 참배를 하지 않더라도, 그곳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일본인들에게는 신사 참배와 동등한 의미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사실 야스쿠니 문제를 일본 국민에게 알리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한국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는 것이다. 야스쿠니 문제를 명분으로 일본을 비판하려면, 내부에서부터 국민적 공감대를 먼저 형성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자기 나라 국민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외국 국민을 먼저 설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