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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안되면 다라이 이고 시장에 나서면 되지요 뭐.”

3년 전쯤 방송에 출연했던 아내가 겁 없이 날린 '멘트'입니다. 생활 형편이 어려우면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시장바닥에 나가 좌판을 벌이면 되는데 사는 게 뭐가 그렇게 겁나냐는 것이었죠.

언제 어느 때고 돌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듯이 그 말을 던져 놓고도 한동안 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던 아내가 요즘 다시 ‘다라이 지고 시장에 나설 수 있는’ 그런 마음 상태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부부는 ‘다라이’ 대신 자동차에 야채를 싣고 대전에 다녀왔습니다. 대나무 하우스에서 재배한 애기배추, 청경채, 상추, 대파, 토종시금치, 그리고 뒷산 속 깊은 곳에서 뜯은 머위와 봄기운에 마악 올라온 햇쑥을 뜯어 만든 쑥떡을 내다 팔고 조금 전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오전 10시쯤에 출발해 오후 5시 반쯤에 돌아온 것입니다.

▲ 대전에 내다 팔 야채를 포장하는 아내가 신이 났습니다.
ⓒ 송성영
아침 일찍부터 대전으로 싸들고 나갈 야채를 준비했습니다. 아내는 떡집에서 얻어온 종이박스에 쑥떡과 야채들을 꽃다발 다루듯 조심스럽게 한 묶음 한 묶음 포장하면서 첫 수확의 기쁨에 들떠 있었습니다. 직접 재배한 농산물이 돈으로 환산 된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던 모양입니다.

박스에 조심스럽게 담긴 야채와 쑥떡을 싣고 막상 대전으로 떠나려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급자족하려고 시작한 밭농사였지만 막상 돈을 받고, 그것도 평소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내다 팔려니 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마침 어제 저녁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습니다.

ⓒ 송성영
“에이, 안되겠어. 비 그치걸랑 가야겠구먼.”
“안되겠다, 내가 따라 갈게, 인효 아빠 혼자 가다가는 그냥 되돌아 올 거 같어, 파는 것은 내가 할게.”
“그려? 그럴까, 그럼.”

비 핑계를 대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려는데 아내가 불쑥 나섰습니다. 팔려고 작정하고 짓기 시작한 농사인데 팔긴 팔아야겠고, 어쩌겠습니까? 나는 못이기는 척하며 아내 꽁무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나는 농사짓는 일은 자신 없지만 포장하고 내다 파는 것은 재미있어.”
“그려? 그럼 나도 좋지.”
“당신은 하루 종일 흙 만지는 것이 좋다니까, 흙만 만지라구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아내는 대전으로 향하면서 내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싱글 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나야 뭐 앞도 보이지 않는 농사일에 무작정 뛰어든 철없는 남편을 따라 주는 아내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올해 농사 계획은 이렇습니다. 10여 가지의 야채를 비롯해 계란, 떡, 청국장, 두부, 고추장, 된장 등 우리 집에서 직접 생산할 수 있는 20여 가지의 품목을 만들 예정입니다. 이 중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품목을 골라 2만 원짜리 상품을 만들 것이고, 20명 정도의 회원들에게 한 달에 2회 배달로 80만 원 정도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대전까지 왕복으로 들어가는 교통비와 씨앗 값 등을 제외하고 나면 한 달 평균 60만 원 정도의 수익이 나올 것입니다. 그동안 그래왔듯이 이 돈이면 우리 네 식구가 얼추 한 달을 생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가. 아내 말대로 밭작물에 손을 뗀 겨울철 생활비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겨울철에는 주로 청국장이나 메주를 쑤어 판매해 볼까 합니다.

메주나 청국장을 쑤는데 들어가는 콩 값 또한 만만치 않은데 이 문제는 올해 아는 후배에게서 공짜로 얻은 800평의 콩밭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좀 어려우면 가끔씩 이런 저런 매체에 글을 써서 받게 되는 원고료와 아내의 아이들 그림 지도에서 나오는 얼마간의 수입으로 충당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초보 농사꾼이기 때문에 농사를 너무 많이 지으면 나도 힘들고, 힘들면 농사 일이 재미도 없을 것이고 농산물 또한 그만큼 질이 떨어질 것입니다. 무엇이든 부대끼면 그만큼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 아닙니까?

지금은 500평 남짓한 밭을 기계 없이 완전 자연농으로 일구고 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농사에 이력이 붙으면 조금씩 평수를 늘려 나갈 예정입니다. 생활비가 농사를 좀 더 짓기를 요구한다면 말입니다. 당연히 지금의 생활비로도 충분하다면 힘들게 밭농사를 늘려 나갈 이유가 없겠지요.

계획 하나 끝내준다고요? 사실 이 계획은 순전히 아내를 위로하기 위한 ‘사탕발림’ 같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대전으로 나오면서 아내에게 이런 ‘야심찬 계획’을 설명했더니 아주 가볍게 받아칩니다.

“에이, 그런 계획 세울 것도 없어, 그냥 하면 되지 뭐, 인효 아빠는 좋아 하는 농사 재밌게 짓고. 나는 포장이나 파는데 신경 쓰고. 그러면 되잖아?”
“어째 좀 이상 허네?”
“나도 말하고 나니까 이상하네, 인효아빠 하구 나 하구 바뀐 거 같지? 당신이 하던 얘기를 내가 하고, 내가 할 얘기를 인효 아빠가 하고...”

그랬습니다. 나는 아내가 불안해 할까봐 지례 겁먹고 ‘야심찬 계획’을 미리 설명했는데 평소 아내답지 않게 담담하게 받아 넘겼던 것입니다. 아내는 요즘 하루도 빠짐없이 명상을 하고 있는데 그 ‘효과’가 있는 모양입니다. ‘다라이’ 지고 시장에 나설 수 있다는 멘트를 날리던 그때처럼 말입니다.

사실 장사를 나섰다고는 했지만 시장 조사를 겸해서 이미 예약된 집에 배달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놈이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나름대로 내 농산물을 고맙게 먹어줄 몇몇 사람들을 선정했습니다. 비록 돈거래가 이뤄지는 일이지만 땀 흘려 일해서 지은 농산물을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었습니다. 아는 사이를 내세워 억지로 판매 하고 싶지도 않고, 또한 아는 처지라서 주문 받겠다는 ‘어거지 소비자’들에게 돈 벌겠다고 시작한 것도 아니니까요.

첫 배달 집은 우리 집 아이들이 책이나 헌옷 등을 물려받고 있는 고종사촌 형님 댁이었습니다. 사촌 형수는 어지간한 물건들은 다시 재활용해서 쓰는 알뜰한 살림꾼입니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운동량이 부족한 요즘 아이들의 건강 문제에 큰 관심을 쏟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몇몇 학부모들과 함께 작은 아이가 다니는 중학교에 기체조를 동영상으로 제작해 보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생협’이나 ‘한살림’ 등에서 판매하는 가격대로 받겠다고 하자 사촌 형수는 소규모로 농사지어 제대로 이윤이나 남길 수 있을까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이것저것 제하고 한 달에 60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네유, 아직은 그 이상 농사지을 자신도 없고요.”

한 달에 두 번 배달을 원칙으로 하고 품목을 따로 적어서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사촌 형수로부터 배달이나 가격 등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를 수집하고 곧바로 엄 선생네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매년 가을, 대전 시민들을 위해 계룡산에서 춤판을 벌이고 있는 무용가, 엄 선생은 종종 남편과 함께 우리 집에 쌀 막걸리를 사들고 놀러 오곤 합니다.

우리 부부를 위해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엄 선생은 야채를 보자마자 아주 기분 좋게 반겼습니다. 우리 부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10만 원짜리 수표를 내밀었습니다.

서로 믿고 지내는 사이인 만큼 알아서 배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10만 원짜리 수표를 건네받는 아내를 제지했습니다. 엄 선생은 좋은 의미로 건넸지만 나는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애지중지 길렀던 야채들이 한순간 자본의 무게에 눌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난감 돈으로 재밌게 소꿉장난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진짜 돈이 생겨 맥 빠지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기분 좋아라 하는 아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엄 선생네 아파트를 나오면서 아내는 내 눈치를 실실 살피면서 말했습니다.

“엄 선생 성격이 화끈하잖아, 돈을 함부로 쓰는 사람도 아니고, 일일이 계산하기 힘드니까 미리 준 건데 뭐, 그만큼 우릴 믿는다는 거잖아.”
“알지 나도, 우릴 위해서 그러는데 당연히 고맙지. 헌데, 기분이 어째 좀 그러네. 빚진 느낌이 들기고 하고, 재미로 하는 건디, 한창 재미있었는데 큰돈을 내미니께 갑자기 놀이판이 깨진 거 같어 싱겁기도 하고.”

“내가 이래서 따라왔다니까.”
“에이, 모르겠다. 날랑 농사나 지을랄다. 다들 야채가 싱싱해서 좋다구 하니까 기분은 좋구먼.”

다음 장소는 십수 년 전에 잡지 일을 함께 하면서부터 줄곧 가깝게 지내오고 있는 김 선생의 기획 사무실이었습니다. 내가 준비해온 야채 꾸러미를 보더니 다들 좋아 할 것이라며 선뜻 반겼습니다.

학생운동권 출신이기도 한 그는 아무리 돈 되는 일이라도 내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양심 바른 사람입니다. 요즘 한창 선거철이라서 이런 저런 일거리가 들어오는 것 같은데 ‘싸가지 없다 싶은 정치꾼’들에게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거부하는 고집불통이기도 합니다.

“선거철이라서 바쁠텐디유.”
“안 하기로 했슈.”

직원 한 명 없이 부인과 함께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김 선생은 대전에서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몇몇 주변 사람들을 확보해 주겠노라 했습니다. 내가 ‘생협’이나 ‘한살림’의 방식대로 킬로그램을 재서 배달하겠다고 했더니 생산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알아서 한 상자에 2만원씩 배달해 달라고 합니다. 내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김 선생은 ‘어차피 사먹는 거 다들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무실을 나오면서 생각해 보니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이 빤할 터인데 공연히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기분은 참 좋았습니다. 김 선생이 내 노동의 가치를 좀 더 높여 줬기 때문입니다. 준비해온 야채 꾸러미를 보고 내가 예상했던 가격보다 더 많이 쳐줬던 것입니다.

나머지 야채 꾸러미들은 형제들에게 건네주고 거기서 내 책을 읽었다는 회원 한 명을 더 확보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그럽니다.

“애들 뭐 좀 사 다 줄까?”
“그러지 뭐.”
“오늘 돈도 벌었겠다. 모처럼만에 제과점 빵 좀 먹어 볼까?”
“그려 좋지.”

“유기농 좋다고 팔러 나왔다가 우리는 유기농과 거리가 먼 빵이나 사 먹구, 사람들이 알면 뭐라 하겠다.”
“괜찮아, 다 그런 겨,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겨.”
“어쨌든, 오늘 다라이 들고 이 집 저 집 돌아서 떨이 하고 가니까 홀가분하고, 기분이 억수로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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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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