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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쫓아가는 것은 곰순이지만 당하는 것 또한 곰순이입니다.
ⓒ 송성영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마당에는 봄비가 내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비입니다. 비를 피해 잠시 밭일을 접어두고 기분 좋게 아내와 단 둘이 남았습니다.

“야옹아, 하면 곰순이가 질투하고 곰순아, 부르면 야옹이가 질투한다. 자 잘 봐봐, 곰순아!"

아내가 곰순이를 부르자 사랑방 아궁이 앞 소파에서 늘어지게 자빠져 자고 있던 곰순이가 부스스 일어섭니다. 부엌 앞 의자 위에 잔뜩 웅크리고 잠들어 있던 야옹이가 “아웅, 아웅” 애교를 부리며 아내에게 바싹 가다가 몸을 비벼 댑니다.

“봤지? 봤어? 야옹이.”
“아니? 뭘? 못 봤는디? 야옹이가 뭘 어쨌다구?”
“뭐? 잘 봐봐.”

나는 못 본 척 딴청을 부리고 아내는 좋은 구경 놓쳤다며 이번에는 야옹이를 어루만져 주며 “야옹아, 야옹아” 부릅니다. 아내 말대로 이번에는 곰순이 녀석이 질투가 나서 컹컹 짖어댑니다. 그렇게 요즘 우리 집에서는 야옹이와 곰순이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곰순이가 우리 집에 들어 온 지는 3개월도 채 안됐습니다. 전희식 선생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찮게 연줄이 닿게 된 곰순이. 2006년 설 전전날, 그 즈음에 우리 식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녀석은 참 대견했습니다. 낯설기만 했을 첫날밤을 보내면서 낑낑 소리도 없이 아주 잘 견뎠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녀석을 생긴 그대로 ‘곰탱이’라고 할까 하다가 ‘곰돌이’라고 불렀습니다. 품종은 혓바닥조차 검은 중국견, 차우차우지만 생긴 게 꼭 곰 새끼처럼 생겼거든요. 녀석의 배때기에 반달무늬만 있으면 영락없이 반달곰입니다. 하지만 녀석은 암놈이었기에 그냥 ‘곰순이’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설 명절을 지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녀석을 자동차에 태우고 대전에 가서 우리 엄니에게 곰이라고 했더니 '그 놈 참 신통타'시면서 깜빡 속아 넘어가시더라고요.

▲ 어찌 보면 곰, 또 다르게 보면 사자나 개코 원숭이처럼 생긴 우리집 곰순이
ⓒ 송성영
녀석의 머리 부분을 놓고 보면 숫사자 새끼 같기도 하구, 얼굴과 코 부위만 놓고 보면 꼭 개코원숭이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누구는 그럽니다. 실실 내 눈치를 보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털보인 나를 속 빼닮았다 하기도 합니다. 부실 부실한 털과 축 처진 눈매를 보면 또 그런 거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지금이나 3개월 전이나 녀석은 그야말로 천방지축입니다. 우리 집에 처음 오던 날, 당시 생후 2개월 정도밖에 안 된 놈이 힘이 펄펄 넘쳤습니다. 뜰팡을 오르다가 헛발을 내딛어 앞으로 꼬꾸라지기 일쑤였지만 새파랗게 어린놈이 할애비 뻘인 진돗개, '갑돌이'에게 젖 비린내나는 이빨을 드러내놓고 왕왕 거리며 엉켜 붙었습니다.

ⓒ 송성영
겨울철에는 닭들을 마당에 풀어 놓고 기르는데, 녀석 때문에 마당이 온통 난장판이 되곤 했습니다. 제대로 찍혔다 하면 '깨깽' 소리가 절로 나오는 수탉의 날카로운 부리와 '뛰어 두발 앞차기 발톱의 위력'을 전혀 모르고 뒤쫒아다녔습니다. 한마디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겁 대가리 상실한 녀석'이었죠.

녀석은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우리 집에 오기 전까지 아파트에서 자랐으니 세상 참 넓구나 싶었겠지요. 녀석은 특히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네 집으로 마실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유씨 할아버지네의 대문 앞에는 언제나 무시무시한 두 마리의 성견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치켜세우고 있었지만 녀석에게는 ‘묶여 있는 개’에 불과했습니다.

녀석이 나타나면 두 마리의 개가 앙앙거리며 죽어라 짖어대지만 녀석은 아랑곳 않고 미련 곰탱이처럼 어슬렁거리며 유씨 할아버지네 집 마당 안으로 들어섭니다. 안방 드나들 듯이 말입니다.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서면 사람도 아니고 자신과 닮은 개도 아니고, 세상에 나와 처음 보는 신기한 동물이 있거든요. 그 덩치 큰 신기한 동물은 우리 동네에 단 한 마리뿐인 누렁이 소였습니다.

녀석은 뭔 볼일이 그렇게 많은지 누렁소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누렁소의 반응은 어떠했냐구요? 뭐 별 게 있었겠습니까? 그냥 그 큰 눈망울을 열었다 닫았다 해가며 “나는 손디, 너는 개인겨, 곰인겨?”라는 표정으로 꿈뻑꿈뻑 곰순이를 내려다볼 뿐이었지요. 어쨌든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서로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네 집으로 뻔질나게 마실 다니더니 결국은 ‘너 소구나, 나는 곰이 아닌 개여’ 식으로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니 별 흥미가 없었나 봅니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 후로 더 이상 찾아가질 않았습니다.

▲ 우리집 아이들에게 미련곰탱이처럼 기꺼이 베개가 되어 줍니다.
ⓒ 송성영
동네로 진출하기 전에 녀석은 우리 집에 들어 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단번에 마당을 '제압' 했습니다. 녀석 때문에 닭들도 마당 근처에 얼씬하지 못했고 특히 우리 집 고양이, 야옹이는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곰순이 녀석이 야옹이만 봤다 하면 성난 황소처럼 돌진했으니까요. 야옹이요? 뭐 어쩌겠습니까? 곰 같은 놈이 콧김 뿜어가며 돌진해 오는데 냅다 도망쳐야지요.

곰순이 녀석은 야옹이를 전생에서부터 뒤 쫒아 온 놈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쫓아갑니다. 어쩌다 웅덩이에 발을 잘못 내딛어 앞으로 퍽퍽 꼬꾸라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죽어라 뒤쫒아갑니다. 야옹이는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고는 꽁지 빠지게 도망칩니다.

야옹이는 곰순이 녀석이 지칠 때까지 도망쳐야 합니다. 곰순이 녀석은 한번 뒤쫒아 가면 혓바닥이 축 늘어져 헥헥 거릴 때까지 뒤쫒아가니까요. 어쩌면 곰순이 녀석이 같이 놀자고 쫓아가는데 야옹이 녀석이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것일 수도 있겠죠.

곰순이와 야옹이의 질주를 가장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우리 집 아이들입니다. 특히 작은 아이 인상이는 학교 갔다가 돌아오면 이 놈 돌보랴, 저 놈 돌보랴, 정신이 없었습니다. 야옹이를 챙기면 곰순이가 안타깝고 곰순이 하고만 놀자니 야옹이가 불쌍했던 모양입니다.

▲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 인상이는 두 녀석 모두의 편입니다.
ⓒ 송성영
혼돈 속에 질서, 질서 속에 혼돈이라고 했던가요? 아무리 혼란스러운 세상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질서가 생기기 마련이듯이 녀석들은 그렇게 1개월 정도를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달음박질하다가 녀석들 나름대로 어떤 질서를 잡아나갔습니다. 예전에는 즉시 뒤쫓아 가고 즉시 도망치는 사이였는데 이제는 영악한 야옹이 녀석이 꾀가 늘었는지 더 이상 꽁지 빠지게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곰순이가 뒤쫓아 오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휙 뒤돌아서 날카로운 발톱을 세웁니다. 곰순이 녀석이 움찔하는 사이에 다시 달아나고 다시 쫒아오면 다시 발톱을 세웁니다. 야옹이 녀석, 그만큼 도망치는데 도가 튼 것이지요.

▲ 야옹이 발톱에 당한 곰순이 콧등에 피가 맺혔습니다.
ⓒ 송성영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동안 곰순이 녀석은 야옹이의 날카로운 발톱에 몇 차례 당하곤 했습니다. 단 한 번도 물어 보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녀석은 어떤 때는 콧등에 핏물이 맺힐 정도로 당하곤 합니다.

매서운 고양이 발톱 맛을 본 곰순이 녀석도 이젠 무작정 뒤쫓아 가지 않습니다. 야옹이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미련 곰탱이처럼 엎드려 있다가 적당한 거리가 형성되면 냅다 쫓아갑니다. 야옹이 녀석도 꾀가 늘어 더 이상 무작정 도망치지 않습니다.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합니다. 곰순이 녀석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나무 위나 담장 위,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 농사철이라서 묶일 수밖에 없는 곰순이를 야옹이가 약을 올리기도 합니다.
ⓒ 송성영
요즘은 야옹이 세상입니다. 한창 농사철이라서 곰순이를 묶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옹이 녀석은 곰순이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바싹 다가와 야옹거리고 약을 올리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줄에 묶여 곰순이 녀석이 왕왕거리며 달려들곤 했지만 요즘은 아예 체념했는지 야옹이 녀석이 가까이 다가와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비로소 야옹이와 곰순이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형성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곰순이가 야옹이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콧잔등에 피가 맺힐 정도로 할큄을 당했는데도 단 한 번도 물어 보지 못한 곰순이. 목줄을 풀어 놓으면 ‘꼭 한번 물어 보고 말거야’ 식으로 여전히 야옹이를 쫒아 다닙니다.

▲ 봄 비오는 날, 야옹이는 부엌 앞에서 잠들어 있고 곰순이는 아궁이 앞 낡은 소파에 퍼질러 자고 있다.
ⓒ 송성영
마당에는 봄비가 내리고 두 녀석은 자빠져 자고 있습니다. 야옹이는 여전히 부엌 앞 의자 위에서 잠들었고, 곰순이는 사랑방 아궁이 앞 낡은 소파 위에 늘어져 있습니다.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입니다. 그간의 정황을 놓고 보면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녀석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평화는 깨지기 위해 존재 하는 것처럼 언제 어느 때고 녀석들의 평화는 단박에 깨져 버릴 것입니다. 마치 우리들이 사는 세상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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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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