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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겉그림
<독서일기> 겉그림 ⓒ 생각의 나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독서일기'만큼 매혹적인 존재도 없다. 누가 무슨 책을 읽었으며 또 어떻게 느꼈는지 그 사색의 창을 들여다보는 일은 즐겁고도 유쾌하다. 때론 나의 독서생활에 큰 자극이 되기도 한다. 더불어 내가 읽은 책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었는지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거니와 내가 알지 못했던 좋은 책을 다른 이의 독서일기를 통해 발견했을 때 그 기쁨 또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독서일기는 단순히 무슨 책을 언제 읽었는지에 관한 기록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준다. 여기에 한 개인의 사색과 깨달음의 깊이가 제대로 담긴 것이라면 단순히 개인적인 기록문서의 차원을 떠나 여러 사람이 함께 읽고 공유할 수 있는 책이 된다. 즉 한 권의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국내작가의 독서일기는 몇 번 읽은 적 있지만 국외작가의 것은 처음이었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일기(A Reading Diary)>는 그런 점에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대부분의 독서일기들이 일(日)단위로 구성된데 반해 이 책은 월 단위로 구성되어있다. 즉 2002년 6월부터 2003년 5월까지 만 1년의 기간 동안, 한 달에 한 권씩 총 12개의 독서일기로 구성되어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예전부터 좋아해온 몇몇 책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결심한 건 쉰 세 번째 생일을 맞은 2년 전이었는데 겹겹이 포개지고 복잡한 과거의 세계들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암담한 혼돈을 반영하는 듯한 모습에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설속의 한 구절이 불현듯 어느 신문기사에 통찰력을 제공하는가 하면, 이런저런 장면에서 반쯤 잊었던 일화가 떠오르고 낱말 하나를 단초 삼아 긴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들을 기록해보기로 했다.' - 머리말 중

오랜 세월 농축된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는 듯한

독서일기에서 가장 먼저 관심이 가는 대상은 바로 텍스트에 있다. 즉 어떠한 책을 읽었느냐가 주관심사다. 이 책에서는 <모렐의 발명>(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작)을 시작으로 영국,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독일, 스페인 등 주로 근대 유럽문학작품이 선정되었다. 지은이가 사춘기 또는 젊은 시절 눈물을 흘리거나 깊은 전율을 느끼며 읽었던 작품들이다. 그 작품들은 몇 년이 지난 후 몇 차례 읽기를 되풀이해도, 여전히 색다른 깊이와 울림으로 다시 다가오는 책들이다. 지은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랜 세월을 두고 깊이 사랑하며 그야말로 가슴으로 읽은 까닭에 토씨까지 줄줄 외울 수 있는 책'들인 셈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텍스트의 줄거리나 플롯, 등장인물 등 텍스트의 전반적인 정보를 상세히 설명하는 배려는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일기는 텍스트에 대한 단순한 정보나 단편적인 감상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 달이라는 기간동안 지은이의 뇌리를 지배했던 텍스트는 잘 익은 포도주처럼 숙성되고 농축된 사색의 깊이를 지닌다.

한 단어나 한 구절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동서양 여러 고전들과 문호들의 글귀들을 인용해가면서 그 심오한 뜻을 파헤치는 실력은 지은이가 보통 방대한 독서량과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가 아님을 실감케 한다. 여기에 인용된 작가들이나 서적수만 해도 약 200개가 조금 못될 정도다. 작가의 표현대로 '인용으로 생각하는 내 버릇을 반영'한 결과다.

주제가 '독서'인만큼 독서에 임하는 지은이의 평소 태도, 지은이가 생각하는 독서의 의미를 담은 글귀가 종종 드러난다. 천천히 읽으며 되새길 만 하다.

'독서는 일종의 대화다. 미친 사람들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들리는 가상의 대화에 열중한다. 독자도 책 속의 낱말들이 소리 없이 불러일으키는 비슷한 대화에 빠져든다.' (머리말 중)

'독서는 편안하고 고독하며 느릿한 감각적인 행위다' (머리말)

'독자는 작가의 방식을 부정한다. 그게 뭐가 됐건, 독자일 때 나는 사소한 세부 내용에 한 눈을 팔거나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방치하면서 세심하게 짜여진 플롯을 무심히 따라간다. 그런가하면 단편적인 작품을 읽을 때는 점 사이의 선을 잇듯이 어떤 질서를 추구한다. 하지만 어느쪽이든 독서라는 건 모두 본질적으로 원을 그리는 것인 양 시작과 끝 사이의 고리를 찾으려 한다.(또는 상상한다)'(134쪽)

'독서공간은 셋 중 하나다. 완전히 개인적이어서 조용하고 차분한 경우, 같이 읽지만 역시 조용한 경우, 이를테면 지면 위에서 눈이 그리고 이어서 입술이 마주치는 단테의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처럼 또는 소리내어 읽는 경우 이때 지면은 오로지 독자만의 것이지 청자의 것은 아니다. 에두아르가 느끼는 '둘로 쪼개는 느낌'의 이중성은 서로 충돌하는 동시 독서법의 이중성이다'(150쪽)

'책 읽기는 세계속에서 겪은 경험뿐만 아니라 지면위에서 일어난 경험들을 채색한다. 전에 읽었던 작가의 목소리를 전혀 다른 작가, 활동했던 공간과 시간이 전혀 다른 작가에게서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많다'(280쪽)


고전을 읽어야 하는 까닭

앞서 나온 지은이의 머리말 중 '겹겹이 포개지고 복잡한 과거의 세계들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암담한 혼돈을 반영하는 듯한 모습'을 누군들 한번쯤은 다 경험해보았으리라.

또한 '전에 읽었던 작가의 목소리를 전혀 다른 작가, 활동했던 공간과 시간이 전혀 다른 작가에게서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의 경험 역시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고전'이 갖춘 힘이자 고전을 읽는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간이 지난 후 다시금 찾아서 또 읽고 그 뜻을 다시 곱씹어보며 음미하게 만드는 힘이다.

<독서일기>를 읽으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에 나온 12권의 텍스트를 미리 읽어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텍스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이 <독서일기>의 진가는 더욱 빛나게 발한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은 우선 12권의 텍스트부터 꼭 읽으라는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12개의 텍스트

<모렐의 발명>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作/ 아르헨티나
<모로 박사의 섬> H.G. 웰스 作/ 영국
<킴> 러디어드 키플링 作/ 영국
<무덤 저편의 회고록> 프랑소와 르네 드 샤토브리앙 作/프랑스
<네 사람의 서명> 아서 코난 도일 作/ 영국
<친화력> 요한 볼프강 폰 괴테 作/ 독일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케네스 그레이엄 作/ 영국
<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作/ 스페인
<타르타르 스텝> 디노 부차티 作/ 이탈리아
<필로우북> 세이 쇼나곤 作/ 일본
<떠오름> 마거릿 애트우드 作/ 캐나다
<브라스 쿠바스의 유고 회고록> 호아킴 마리아 마차도 데 아시스 作/ 브라질

알베르트 망구엘(Alberto Manguel)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이자 번역가이자 편집자. 학창 시절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난다. 시력을 잃어가던 세계적인 문호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그의 독특한 촌평에 영감을 받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영국, 타히티, 캐나다 등지를 옮겨 다녔고 현재는 '예술과 문학 기사(騎士)'작위를 받은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국내에서 출간된 <독서의 역사> <나의 그림읽기> 등이 있다.

덧붙이는 글 | 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생각의 나무/ 12,800원


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생각의나무(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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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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