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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몸이 두 발자국 밀리며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으...음.... 웬 놈이냐?”
보통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맹렬한 고통에 우상은 저절로 신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충격이 느껴지는 게 내력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우상의 시야로 땅에서 솟은 듯한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어둠과 완벽하게 동화되는 묵빛 옷을 걸쳤다. 더구나 유일하게 밖으로 드러낸 얼굴은 묵빛을 닮은 듯 검었다.
바로 여섯 째 등자후(鄧玆厚)였다. 숯처럼 검고 굵은 눈썹 아래의 두 눈 역시 가늘게 떠서인지 흰자위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를 쓱 훑은 우상의 시선은 자신의 양 손에 흠집이 나게 한 등자후의 양 손에 멎었다.
검은색이었지만 유난히 희미한 달빛을 받아 윤기가 흐르는 쌍수였다. 허나 그것은 분명 맨 손이 아니었다. 상의의 소매가 보이지 않았고, 팔뚝까지 올라오는 검은 색의 수갑(手甲:장갑)을 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묵린갑(墨鱗匣)인가? 그렇다면 네 놈은 등자후인가 하는 놈이 틀림없겠군.”
묵린갑은 중원오대기병 중 하나다. 어떠한 도검으로 자를 수 없고, 묵린갑과 마주치거나 스치면 도검에 베인 것처럼 상처를 입는다는 그것이다. 진기를 주입시키면 비늘이 세워져 스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치 고기를 다진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기병. 우상의 손아귀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형.... 어서 가시오. 이 자는 내가 맡겠소.”
등자후는 긴장된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 말에 백결이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차피 작정했다면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그럼.... 부탁하마..... 무리는 하지 말아라....”
백결은 잠시 근심스런 눈으로 등자후를 보다가 몸을 날렸다. 이미 들킨 이상 숨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허나 그가 신형을 띠우기 무섭게 우상은 피가 배어나오는 손으로 어느새 발검(拔劍)해 도망가려는 백결의 하체를 쓸어왔다. 이미 예견했다는 듯 등자후의 신형 역시 빠르게 미끄러지며 쌍수로 우상의 검을 잡아채갔다.
까가강!
검과 등자후의 묵린갑이 부닥치자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을 이용해 백결은 빠르게 신형을 날렸는데 그는 땅을 채 두세 번 차기도 전에 그의 전신을 난도질할 듯 쏘아오는 세 자루의 검날에 몸을 비틀어야 했다.
“헙.....!”
사내들은 우상과 같이 모두 백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들의 검은 매섭고 직선적이었다. 뒤 이어 이쪽저쪽에서 몇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우상은 백결이 나타날 것에 대비해 철저히 준비한 것 같았다.
함정에 빠진 것과 같았다. 백결은 난감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떻게 하든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려 노력했다. 반드시 만나야 했다. 자신을 비롯한 섭장천 일행이 더 이상 숨어 있는 것은 무리였다. 더 이상 숨어 있을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방백린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담천의를 만나고, 제마척사맹과 연합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수없이 기회를 노리다 나선 것인데 함정에 빠진 꼴이 된 것이다. 자신만이라면 다행이지만 등자후까지 위험에 빠뜨린 것 같아 가슴이 무거웠다. 백결은 검을 뽑아 들고 가차 없이 살수를 펼쳤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안위에 상관없이 일단 이 포위망을 뚫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제마척사맹의 수뇌부 약 이십여 명이 있는 자리에서 세 사람은 자신의 손바닥에 쓴 글자를 펼쳐보였다. 바로 담천의와 몽화, 그리고 모용화궁이었다. 담천의가 왼손을 앞으로 내밀자 두 사람 역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손바닥을 펼쳤다.
“헛........!”
“으음........!”
세 사람의 펼쳐진 손바닥 안에 써있는 글자를 보는 순간 앉아있는 좌중의 입에서 놀라운 기색과 함께 탄식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세 사람의 손바닥에 써있는 글자는 똑같았다.
정주(鄭州) 손불이(孫不二)
세 사람의 의견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합치되었으니 분명할 것이다. 충격은 잠시 후에 밀려들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밝혀진 것이다. 정주 손가장의 장주 손불이가 모용화천이다!
상인연합회에도 속하지 않은.... 그렇다고 천하제일의 갑부라고도 할 수 없는, 그저 후한 인심과 친구들이 많기로 소문난 일개 상인이 지금 중원을 뒤흔드는 음모의 주역인 것이다. 더구나 손불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모용화천이란 이름으로 천지회 세 명의 회주 중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유곡을 몰아낸 지금은 천지회의 유일한 회주다.
하지만 좌중의 경악은 다음에 떨어진 담천의의 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정도였다. 아예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더구나 모용화천은.... 정주의 손불이는 천동(天洞)의 동주(洞主)임에 틀림없소. 지금 중원에서 부는 혈풍은 바로 천동이 움직인 결과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중원의 수호신으로 생각되었던 신비스런 천동이 이번 혈사의 주인공이라니.... 더구나 과거 절대구마의 혈겁을 종식시켰던 천동이 그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니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간간이 이어지는 문파의 전서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기는 했다. 내력을 알 수 없는 인물들과 알아볼 수 없는 신비막측한 무공을 사용한다는 내용에 혹시나 새외세력이나 절대구마와 같은 또 다른 무리들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도 추측을 했었다.
하지만 담천의의 말이 옳다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제 서야 좌중은 이해할 수 있었고, 이해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천동이 수십 년 간 철저하게 준비해 왔다면 자신들이 문파에 남아있었다 해도 막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한동안 받은 충격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천막 밖에서 백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주... 백렴이오. 보고 드릴 사항이 있소.”
담천의의 눈빛이 반짝했다. 그는 옆에 앉은 구양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구양휘 역시 뭔가 기대에 찬 표정이었는데 그는 별로 입은 적이 없었던 흑의경장을 걸치고 있었다. 어떠한 일이 발생한다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차림새다.
“들어오시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렴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백렴 역시 흑의경장이다. 그러고 보니 광도 역시 마의를 벗어던지고 흑의경장을 걸치고 있다.
“영주께서 예측하신대로 저쪽에서 병장기 소리가 들리고 급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소. 물론 본 맹에서 움직인 사람은 없었소.”
중요한 일인 만큼 이미 백렴에게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주시하라며 지시했던 사항이었다. 혹시나 백결이 움직이다가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담천의는 구양휘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움직여 줄 수 있겠소?”
자신이 나서고 싶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은 몸이다. 백결의 무공수위를 아는 담천의로서는 그저 단순하게 빠져나오려는 백결에게 문제가 생길 정도라면 완전치 못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은 만용이다. 자칫 만용은 동료들의 짐만 될 뿐이다.
“백결형의 모습은 우문주께서 아시니 분간은 하실 수 있을 것이오.”
이미 이런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고 구양휘 등에게 미리 부탁을 해 둔 터였다. 하지만 적진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해오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몸이 뻐근할 것 같은데...... 가 보지.”
그가 고개를 가로로 몇 번 꺾자 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개운한 표정과 함께 광도에게 눈짓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볍게 좌중에 눈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천막을 빠져나갔다. 이어 광도와 우교가 뒤따르고 독혈군자 당일기마저 따라 나갔다. 들어왔던 백렴 역시 급하게 뒤를 따랐다.
“저 정도 인원만으로 가능하겠소?”
대충 상황을 짐작한 구효기가 물었다. 일당백의 고수라 하나 겨우 다섯 명이다. 담천의는 고개를 끄떡였다.
“어려울지 모르오. 허나 저들 역시 우리가 도우러 간다고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니 일러 준대로 무리하지 않는다면 무사히 돌아 올 것이오. 다만 만약을 위해서 몇 분께서 준비해 주시길.....”
담천의의 시선이 무당의 청송자와 철혈보의 독고문을 비롯한 고수들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아마 예상대로 구양형이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데려온다면 이곳을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이냐 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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