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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 게이트볼 대회
우리 구 게이트볼 대회 ⓒ 김관숙
한강시민공원 게이트볼 전용구장에서 생명문화회 총재기 우리구 게이트볼 대회가 있었습니다. 아주 큰 대회라 경기 끝난 뒤에는 경품잔치도 있어서 참석한 회원들은 모두 번호표 하나씩을 받았습니다. 나도 번호표를 받았지만 초보회원인지라 응원만 열심히 하다가는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각자가 줄 서서 타가지고 온 꽤 괜찮은 주문 도시락을 둘러앉아 먹는데 역시 나와 같은 초보인 이웃이 작은 프라스틱 통 하나를 가방에서 꺼냅니다. 청국장 가루입니다. 청국장 가루를 한 스푼 떠서 미지근해진 멀건 우거지 국에 타면서 심기 불편한 얼굴로 말 합니다.

"장가 가면 어미 말보단 지 마누라 말이 제일이라더니 내가 이번에 단단히 경험을 했다구."

모두들 놀란 얼굴입니다.

"뭔 말야?"
"아니 지난 3월에 결혼 시켰는데 벌써 무슨 일 있는 거야?"

"글쎄 그 애가 결혼 전에는 내가 요 청국장 가루를 먹으라구 먹으라구 해도 안 먹었다구. 요구르트에다 한 숟갈을 타서 줘 보기도 하구 주스에다 타서 줘 보기도 하구 아무튼 별 짓을 다 해도 안 먹는 거야. 변비나 없다면 몰라. 술을 자주 먹어 위도 좋지 않은데 말야. 냄새가 싫대나. 나중엔 인상을 다 찌푸리길래 포기하구 말았지. 근데 요즘 매일 매일 먹고 있다지 뭐야."

"어머머, 정말야?"
"처가가 시골이잖아. 장모님이 손수 만들어가지고 와서는 미숫가루 타듯이 맨 물에 타서 주는데도 꿀꺽 꿀꺽 잘 먹는다는 거야. 내 참 기가 막혀서 원. 어버이날 며늘애랑 왔는데 영문 모르는 며늘애가 그런 얘길 하는 거야. 대뜸 아들애 머리에 알밤을 콩 박았지."

"맙소사, 그건 너무 했네. 며늘애 보는데 말야"
"며늘애가 잘 했다구 하던데. 진즉에 먹었더라면 변비도 없어졌고 장이 좋아졌을거라구 하면서."

"그니까 장모님 앞에서 그냥 순한 양이 됐단 말이네."
"내 말이 그 말야. 배반감이 다 든다니까."

선수들이 멋 있습니다. 초보는 경기를 보는 것도 공부 입니다
선수들이 멋 있습니다. 초보는 경기를 보는 것도 공부 입니다 ⓒ 김관숙
삼십이 훌쩍 넘은 우리 아들도 청국장 가루를 싫어합니다. 청국장도 싫어합니다. 자식들은 나 보다 더 많이 배웠습니다. 상식 수준 역시 내 머리 위에서도 저 높이에 있어서 발효식품인 청국장이 과다 지방이며 콜레스테롤 성분 같은 것을 흡착해서 몸 밖으로 배설시킨다는 것은 물론 그 밖의 다른 효능까지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아들에게 요구르트에 청국장 가루를 타서 주면서 '유산균 덩어리, 장 튼튼, 숙변제거' 라고만 말하면서 코앞에 들이 밀어댔습니다. 어쩌면 그런 내 모습이 성의가 없어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즉시 딱 거절을 당한 뒤로는 두 번 다시 권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둘이서만 먹습니다. 아들이 보거나 안 보거나 하루 한 번씩 공복에 요구르트에 청국장 가루를 한 스푼씩 타서 남편과 마주 앉아 즐겨 먹고는 합니다.

우리 동네 팀은 초반에 일찌감치 지고 말았습니다. 기다리던 점심도 끝났고 하나 둘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초보들인 우리 몇은 다른 동네 팀들의 경기를 보는 것도 공부라면서 열심히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경기가 종료된 후에 실시하는 경품잔치가 있기는 하지만 당첨 확률이 미미한 그것을 염두에 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경기를 보면서 경기장에 나온 오랜만에 보는 아는 얼굴들을 두고 또는 그들의 경기하는 모습을 두고 수다를 떠는 맛이 보통 재미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재미도 누릴 겸해서 우리는 우리가 앉아있는 바로 앞에 제3 경기구장을 열심히 바라봅니다.

선수들 중에는 머리가 하얗고 어깨가 굽은 칠십 대 어르신들도 많습니다. 동작은 조금 느려도 젊은 선수에게서는 볼 수 없는 아주 노련한 플레이를 펼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슬라이드 타격 법도 보았습니다.

"저 어르신 말야, 10번. 9년 되셨대나 봐."
"야아, 정말 잘 하시네. 부럽다. 우린 언제 저런 실력이 되서 대회에 나가나."
"어머, 5점 나셨어! 5점!"
"8강 가겠네!"

우리 아들도 청국장가루 물을 아주 싫어 합니다.
우리 아들도 청국장가루 물을 아주 싫어 합니다. ⓒ 김관숙
우리는 감탄을 합니다. 우리들의 시선은 건강이 넘쳐나 보이는 그 어르신이 경기가 끝나서 팀원들과 같이 가슴에 걸었던 번호판을 풀어 바구니에 넣고 경기장을 나와 우리들 옆 저쪽으로 가서 의자에 앉는 모습까지 따라 갔습니다. 부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건네 준 노란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모습도 얼마나 근사하고 멋있는지를 모릅니다. 스타가 따로 없고 화면이 따로 없습니다.

"저 어르신 분명 청국장 가루 매일 드실 거야. 그래서 건강하실 거야."
"그만 좀 해. 아들 머리 콩 박았음 됐잖아. 분하면 한 번 더 콩 박아주던지."

누군가 말에 모두들 웃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아들에게 청국장 가루 먹이고 싶었던 거 사돈 덕에 이루어졌잖아. 그럼 됐지 뭘 그래"
"맞아, 사돈께 고마워 하라구."

그러나 당사자인 이웃은 쓸쓸히 웃기만 합니다. 아직도 낳아주고 길러 준 자신이 먹으라고 할 땐 안 먹고 이제 만난 지 겨우 서너 달 밖에 안 된 장모가 먹으라고 하니까 순한 양이 되어 덥석 받아먹었다는 아들이 무척 야속하고 섭섭한가 봅니다. 그 마음, 알고도 남습니다.

우리들 바로 뒤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세 자식들을 일찌감치 결혼시켜서 손자손녀가 다섯이나 되는, 근동에서는 게이트볼 도사로 통하는 옆 동네 회원이 걸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습니다.

"건 아무것도 아냐. 이제부터 섭섭한 일이 줄줄이 사탕야. 이번 일을 교훈삼아 마음대비 하라구. 뭐든 좋은 쪽으로만 생각을 해야 해. 나 봐 그렇게 사니까 마음 편해 이 배 나오는 것 좀 봐. 임신 6개월이라구."

우리는 모두 그의 배를 보고 웃었습니다. 겉으로는 표현 못하고 속으로만 뚱뚱하시네 하다가 본인이 임신 6개월 이라고 비유를 하면서 더욱 배통을 쑥 내미는 바람에 마음 놓고 웃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합니다. 누군가가 그런 체구로 어떻게 게이트볼 도사가 되었냐고 하니까 스틱을 처음 잡던 10년 전에는 배가 하나도 없었던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5월도 푸르고 회원들 유니폼도 푸름니다
5월도 푸르고 회원들 유니폼도 푸름니다 ⓒ 김관숙
"형님 댁 며느린 워낙 잘 하잖아요."
"거, 내가 속상한 거, 섭섭한 거, 다 숨기고 너그럽게 부드럽게 나간 탓야. 내가 잘 하니까 그렇게 돌아오는 거라구. 그리구 장모 앞에서 아들이 순한 양이 되고 싶어 되었겠어? 반기 들면 시끄럽잖아. 그러다가 보니 자신도 모르게 청국장 가루 맛을 알게 되었을 테구 말야. 안 그래?"

그제야 이웃은 빙그레 웃습니다.
"형님 말이 맞아요. 그랬을 거예요. 근데 맏아들이고, 처음 당한 일이라 저 너무 힘들어요."
"알아 알아. 그래두 엄마가 이해를 해 줘야지 어쩌겠어."

게이트볼 경기가 끝나고 이어진 경품잔치에서 우리들 중 유일하게 이웃과 나만이 가지고 있는 번호가 당첨이 되었습니다. 정말 뜻밖에 횡재를 했습니다. 이웃은 노란 티셔츠를 나는 흰 티셔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까 사이즈가 100입니다. 내게는 너무 큰 사이즈 입니다.

"내가 입기엔 너무 커. 우리 아들 줘야지."
그러자 이웃이 자기가 받은 노란 티셔츠를 가방에 넣다 말고 벌컥 면박을 줍니다.

"아들은 무슨, 신랑 주라구, 신랑!"

그렇게 말하는 이유야 어쨌든 간에 내 늙은 남편을 신랑이라고 불러 주는 것이 우스워서 나는 풋 웃습니다. 그러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습니다. 가방을 메고 훌쩍 돌아서는 이웃의 모습이 백만 대군을 잃은 듯이 그렇게 외롭고 쓸쓸해 보입니다. 아,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저 쓸쓸한 모습이 바뀌려나.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나까지 우울해 집니다.

나는 얼른 흰 티셔츠를 챙겨 넣은 색을 어깨에 걸칩니다. 그리고 일부러 이웃과 팔짱을 착 끼면서 농담조로 말 합니다.

"그 노란 티셔츠도 사이즈가 100이던데 보나마나 사랑하는 신랑님 주겠네."
"늙은 영감이 뭐가 이쁘다구. 아들 줄 거야."

이웃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놀라워 하다가 내가 먼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따라서 풋 하고 웃습니다. 모성은 큰 나무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뿌리 깊은 큰 나무 입니다. 아마도 맨 꼭대기에 작은 이파리 하나가 높고 높은 하늘을 향해 저 혼자 흔들거리다가 말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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