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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도 환한 봄날> 표지
ⓒ 만인사
요즘은 아니 이 시대 사람들은 웃을 일 참 별로 없는데 이 시집엔 웃을 일 거나하다. 세상 밝게 보는 시인의 눈이 있다. 시를 쓰면서 그런 눈 갖기는 생각처럼 쉬운 일 아닌데 시인은 그것도 자유시 아닌 시조로 풀어내고 있으니….

실제 대부분의 시들이 '울상'이다. 때때로 '울상'이 '밉상'처럼 읽힐 때도 있다.(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어디 기쁠 때 시가 쓰이는가? 아무래도 심사가 뒤틀리거나 축 처질 때 쓰는 것이 시이리라. 이른바 슬픔의 해학적 처리나 극복은 그래서 남다른 것이리라.) 물론 시의 밝기와 어둡기는 조절되어야 하겠지만 가끔은 기쁜 시, 즐거운 시도 읽어보자. 시인도 좀 웃고 독자도 제발 좀 웃자. 웃어보자. 그래야 세상도 시인 덕에 크게 한번 웃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 좀 삐걱대도 세상 좀 모자라도 그것 좀 뒤집고 비틀어대서 한번 제대로 웃어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시의 본래 역할 아니겠는가. 세상 향한 풍자는 거창하더라도 자기 향한 조소라도 해볼라치면 혹시 콱 막힌 제 속은 두말할 것 없고 그 시 따라 읊는 마주한 사람 속도 뻥 뚫릴지 또 아는가?

정작 세상 맑게 사는 사람들 보면 제아무리 그 삶 힘겹고 버거워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잘만 살더라. 거 무엇이더냐. 그저 웃어제치더라. 웃고 말더라. 이미 김상용이라는 한 시인이 읊은 적 있다.

"왜 사냐건 웃지요"

'죄'의 이미지는 무겁다. '족쇄', '수갑', '형벌' 뭐 이런 게 먼저 떠오를 테니. 그런데 시인은 이를 가볍게 처리한다. 이해하라. 시인의 시적 처리 방식이다. 그러나 조심하라. 그렇다고 실제로 함부로 했다가는 용서 안 된다. 심심하다고 그랬다간 큰일 난다. 책임 못 진다.

엄청//심심한 날//무지개 뜬 저녁답엔//수리못 도라지밭에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새하얀 꽃봉오리를//몰래 가서//만져//볼까

탱자나무 울타리 옆 더 더욱 더 탱탱 부푼,//천(千)의……//봉오리 중에//보라빛 꽃도 골라,//하․나․씩, 톡, 톡, 터, 뜨, 려,//죄라도 좀//지어/볼까

- '죄라도 좀 지어볼까' 전문


어쩌면 현대인들은 죄 짓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천(千)의' 죄를 지으면서도 아예 의식하지 못하거나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 또 한편 죄 안 짓고 사는 이가 있을까마는 때로는 이러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고픈 존재 역시 인간이 아닐는지? 평생을 고개 숙이고만 살 수는 없는 게 인간이고 보면 고개 좀 들게 하는 것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리라. 이러나저러나 시인이 이 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인간 세상의 도면은 인간의 탐미적 본성(혹은 본성적 탐욕이나 애욕)이 사회의 통제에 마지못해 속깨나 태우는 모양새다.

어쩌면 인간의 근원적인 탐욕이 죄의 출발인지 모른다. 다만 그러한 욕망이 사회적으로 규제되어 있어 그저 내밀화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인간의 탐욕을 다스리는 일이 '선'이 되고, 그리하지 못하면 '악'이 되는지도 모른다. 허나 신이 마련한 인간의 본성인 것을, 자연스레 분출되는 인간 심성의 일인 것을 어찌하면 좋으랴.

직장경(直腸鏡) 검사를 위해 궁둥이에 호스를 꽂고
바람을 불어넣자 풍선처럼 부푸는 배,
사지를 부르르 떨던 추억 속의 개구리 배
천(千)의 궁둥이에 보릿짚을 꽂아놓고,
후― 불었던 그 바람이 어딜 돌아다니다가 지금에야 난데없이 배 속으로 밀려오네
아 결국 내가 내 궁둥이에 내 손으로 보릿짚 꽂고 내 입으로 후― 불었군.

- '그 바람' 전문


'자업자득' '인과응보'란 말인가. 허허, 그렇다고 불교적 목소리를 내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의 몇몇 장면이 스쳐지나가는 것은 막을 길이 없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어릴 적에 잠자리 시집보낸답시고 꼬리 떼어내고 굳이 그 속 알겠다고 개미굴 파헤치고 그랬으니… 공기총 들고 참샌가 뭔가 잡으러 돌아다니던 사촌형 따라 신나 했으니… 어찌하면 토끼를 잡아볼까 이 궁리 저 궁리도 했으니… 이 시대로라면 나 역시도 큰일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죄를 지을까? 혹시 애초 순수하지 못해서?

참 티 없는 하늘일세//눈물이 날라카는,//참 티 없는 하늘 아래//안과를 찾아 가네//
뭐라고? 눈물조차도 순수하지 못하다고?

- '병인'(病因) 전문


시 끝의 '?'에는 못마땅한 눈이 박혀 있다. 그러면서 어이없는 표정도 짓고 있다.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난 참 이렇게 선한 구석도 있다오." 하고 한껏 보여주었건만 이 '순수' 결정의 '눈물'이 위선 등속의 따위로 치부되는 현실에 시인은 난감난색이다. 하늘 닮은 그가, 그녀가 '순수하지 못하다'니 성낼 만도 하겠다.

길 건너 수양버들이 전화를 걸고 있다/
지금쯤 누구네 집의 전화통이 울고 있을까/
오, 야호! 내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운다, 야호!

- '오, 야호!' 전문


시인에게 이토록 기쁜 날도 있나 보다. 알고 보면 '개코'(시인의 시 '시인'이란 시를 보면 이 시 1연에 '알고 보니 시인이란 게 개코도 아니더군'이라는 구절이 있다.)도 아니다. 특별히 기다리는 전화가 와서 받는 거라면야 축하할 일이지만 그저 평범한 휴대폰 벨소리에 환호성까지야? 그래 그렇다면 좀 고상하게 풀이하여 시인은 지금 '길 건너 수양버들'과 통화 중.

석 달//열흘 동안//거기 가서 자고 싶소//지게문 닫아걸고 겹겹으로 휘장치고 가랑잎 이불을 덮고 모로 누운 달팽이 옆,

- '거기 가서 자고 싶소' 전문


어쩔 수 없이 울적한 날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두문불출'인가. 백일 금식도 백일 기도도 아닌 백일 취침이다. '달팽이'와의 동침. 도대체 어찌하여 '달팽이 옆'을 그리게 되었단 말인가. 글쎄, 그중의 답 하나를 다음 시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내 그대 가슴에다 말뚝을 박는 순간 그대는 내 발목에 자물통을 덜컥 채워,//말뚝에 묶인 자물통 녹이 슬고 있다, 통재(痛哉)!

- '관계' 전문


흔히 쓰는 표현에 '가슴에 못 박는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 관계도 따지고 보면 주거니 받거니 인과응보요 자업자득이다. '내'가 '그대 가슴에' '말뚝을 박'았으니 '그대'라고 가만있을쏘냐. 공격을 해올 터. 떡하니 '내 발목에 자물통 채워' 물고 늘어질 태세다. 내 발등에 불 떨어진 격이다. 심지어 '녹이 슬고 있다'.

이종문 시인은?

▲ 이종문 시인
ⓒ 만인사
1955년 경북 영천에서 남.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시조시집 <저녁밥 찾는 소리>를 낸 바 있다.
한문학자이기도 한 시인은 주로
고려시대 한문학과 관련된 상당량의 글들을 집필한 바 있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인간 관계란 것이 서로를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시시때때로 서로를 구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편할 때도 있고 거부감 생길 때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떨어져 지내야 할 때도 있다. 결코 사이좋은 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래서 '인간 관계'는 '거리'의 조절이 필요한가 보다.

'기쁨' '슬픔'의 감정 생성이 단순한 것도 확연한 것도 아니지만 이 시집이 주는 전체적인 마음씨는 '웃음'이고 '미소'이다. 웃음은 세상을 극복하는 현명한 방법이자 현인의 삶의 방식이다. 세상 밝게 사는 자야말로 세상 행복하게 사는 자일 것이다.

봄날도 환한 봄날

이종문 지음, 만인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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