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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만인사(대표 박진형)라는 작은 출판사가 있다. 그곳에서 '만인시인선'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1년에 서너 권씩의 시집을 펴내고 있는데, 그 시집들이 하나같이 태(態)가 깔끔하고 정제된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만인시인선15 이종문 시집 <봄날도 환한 봄날>을 어느 지인(知人)으로부터 선물로 받아 읽어 보았다. 시인 이종문은 현재 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인데,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조집 <저녁밥 찾는 소리>를 이미 상재한 바 있다.

시집 <봄날도 환한 봄날>을 읽다가 나는 중도에 책을 덮고 몇 번이나 소리내어 실없이 웃었는지 모른다. 참 재미난 시집이었다.

▲ <봄날도 환한 봄날>
ⓒ 만인사
읍내에 신장개업한 윤씨농방 안주인이 엄청 미인이라 소문이 파다하기,
오후에 버스 타고 가 구경하고 왔지요
안주인은 소문보다 훨씬 더 絶景이라, 내일 모레 글피쯤에 다시 갈까 하는데요,
그 누구 같이 갈 사람 요오, 요오, 붙어라


'윤씨농방'이라는 시인데, 얼마나 재미있는가. 또 '시인'이라는 시도 그러하다.

"알고 보니 시인이란 게 개코도 아니더군// 시인 김선굉이 찔레밭에 엎어져서/가시가 온통 박혀 고슴도치가 되었는데,/시인 서너 명이 다 달라붙어 봐도/조그만 가시 하나도 뽑아내지 못했다네//아 글쎄, 시인이라는 게 바늘 하나만도 못해"라는 언술 속에 시 혹은 시인라는 자못 진지하고 무거운 대상을 바늘 하나만도 못하다고 비웃고 장난을 걸고 있다.

또 '고향길'이라는 시 "내 고향 사투리는 울퉁불퉁 자갈밭길, 럭비공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자갈밭길//문디야, 가시나들아, 누가 자바 뭉나…"에서는 경사도 고향 사투리가 질퍽하게 녹아들어 시의 훌륭한 제재가 되고 있다. "누가 자바 뭉나…"라는 시인의 외침에는 시인의 고향과 어린 시절 동무들, 지난 추억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시인의 바람이 절절하게 묻어있다.

그리고 '어처구니'라는 시는 정말 나를 어처구니 없게 만든 시다. '어처구니'란 맷돌을 돌리는 손잡이를 가리키는 말인데, 손잡이가 없으면 맷돌을 돌릴 수가 없으므로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한다. "온통/난장판인/어처구니없는 세상,/제일로 그 중에도 어처구니 없는 것은/知天命, 이 나이토록/어처구닐 모른/그 일"

"신문 투입구로 살그머니 들어오는 붉은 손톱이 달린 희고도 차가운 손,//잡으면 기겁하겠지, 야쿠르트 아줌마!"라는 '손'이라는 시도 기막히게 재미난 시다. 읽는 독자의 속이 다 시원하다.

내용 파악하기도 어려운 언어의 현란한 수사만 가득찬 시, 값싼 감상의 넋두리만 강요하는 시, 폼만 거창하게 잡고 녹슨 귀씬 씨나락 까먹는 높은 소리만 하는 시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이종문의 시는 가히 충격적이다. 귀한 시집이다. 이런 것도, 이렇게 쓰도 시가 되는구나 감탄이 절로 나온다.

시가 서사가 아니라 서정의 장르임에야 순간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혹은 얻어지는 정서를 언어로 빚어낸 것이라면 길이에 관계없이 충분히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 시집 <봄날도 환한 봄날>은 앞머리에 있는 <시인의 말>에서처럼 "짧으면서도 긴 여운을 거느리고 있는 시, 가락이 펄, 펄 살아 있어서 술술 읽혀지고 외워지는 시…쉽게 이해되고 저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 시, 이게 정말 시야? 라고 생각되면서도 시가 아니라는 증거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시"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실컷 웃음을 주면서도 그 내용이 독자의 가슴에 그대로 안겨오는 시가 정말 좋은 시가 아닐까? 이종문의 시는 바로 그러한 시다. 소리 내어 실컷 웃다가 도(道)의 엿 모습을 본다, 는 것이 이종문 시집 <봄날도 환한 봄날>에 대한 나의 독후감이다.

시집 <봄날도 환한 봄날>이 간결하고 재미있는 시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천착하고 있는 시도 여러 편 있다.

자동판매기의 커피를 뽑아 먹고 일회용 종이컵을 창틀에다 두었더니,
어디서 나타났는가, 저 무수한 실개미떼
무심코
그 빈 컵을 휴지통에 던졌는데, 사각 모퉁이에 거꾸로 튕겨나와
哭 소리 신음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용천역 폭발 사고, 유영철 연쇄살인
未曾有, 破天荒의 남아시아 해일 참사 ---
누굴까? 저 하늘에다 냅다, 종이컵을 던진 이는

- '무심코' 전문.


위 시에서 본 바대로 시인은 하늘문에다 이런 인류의 고통과 불행이 어디서 왔느냐고, 왜 오는 것인가, 라고 진지하게 묻고 있다. 또 이 물음은 하늘문에다만 묻는 것이 아니고 이런 사건 사고가 일으키는 우리 사람들에게도 묻는 일인 것이다.

(가)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浩然亭 대청마루
를 자질하며 건너간다
우주의 넓이가 문득,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浩然亭 대청마루
를 자질하다 돌아온다
그런데, 왜 돌아오나
아마 다시 재나보다


위에서 인용한 시(가)와 (나) '봄날도 환한 봄날'이라는 동일한 제목의 시다. (가)는 시집 맨 앞머리에 놓였고, (나)는 시집 맨 끝머리에 놓여 있어 그 배치가 독자의 주목을 끈다.

넓고 넓은 호연정 대청마루를 자질하며 건너가는 자벌레는 우주의 넓이와 깊이를 재는 이종문 시인 자신을 뜻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시(가)와 (나) 사이에 있는 시집 <봄날도 환한 봄날>에 수록되어 있는 시편들은 이종문 시인이 이 세상 삶의 깊이와 넓이를 잰 그 내용물이라 부를 수 있겠다. 이종문 시인이 이 세상을 자질하며 재어 놓은 그 깊이와 넓이를 들여다 보는 재미가 작지 않다.

봄날도 환한 봄날

이종문 지음, 만인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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