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기를 안은 엄마도 한 표를 행사하러 기표소에 들어섰다.
아기를 안은 엄마도 한 표를 행사하러 기표소에 들어섰다. ⓒ 한성희
5.31 지방선거가 실시되던 날 오후, 파주시 투표소 현장을 찾아 취재를 하던 중이었다. 광탄면 취재를 끝내고 교하읍으로 향하는 도중, 전화가 울린다. 광탄면사무소 총무계장이다.

"광탄면 들어오셨다면서요?"
"취재 끝내고 나가는 길인데요."

"영장초등학교에서 영정 사진 찍어준다고 하는데 안 가보세요?"
"폐교된 곳 말인가요?"

"자연문화체험학교 있잖아요. 김옥조 교수님이 운영하시는 데요. 거기에 투표소 있어요."
"아하! 그런데 투표소에서 영정사진을 찍어줘요?"
"그렇다니까요. 오늘 영장초교에서 투표소가 설치된 게 좋아 지역주민에게 봉사하시는 의미에서 하는 거래요."

그동안 잊고 있던 김옥조 교수를 본지도 오래됐고 흉금 없이 속을 다 털어놓는 털털하면서도 순수한 성격의 그녀를 만나고픈 생각에 두말 않고 차를 돌렸다. 만나본 지 한 2년 됐나.

폐교된 터를 이용한 자연문화체험학교.
폐교된 터를 이용한 자연문화체험학교. ⓒ 한성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영장초등학교는 오래 전 폐교돼 (사)자연문화체험학교가 들어와 있다. 이 문화학교는 이화여자대학교 조형미술대 김 교수가 사재를 탈탈 털어 마련한 도자기 만들기를 비롯해 각종 문화를 체험해 보는 공간이다.

예전에 지나가던 길에 몇 번 들러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었는데 그동안 너무 뜸했었는데 갑자기 투표 날 웬 사진 찍어주기인지. 하긴 그간 보아온 김 교수의 성품으로는 그런 일을 벌일 만도 했다.

영장리는 전형적인 농촌 동네로 인구수가 적다. 보광사 쪽으로 가다가 소령원으로 꺾어 들어가다 보면 메타세콰이어가 청청하게 솟아 담장을 둘러싼 예쁜 문화학교가 나타난다.

트럭을 몰고 온 아저씨가 차를 세워두고 투표장에 들어갔다.
트럭을 몰고 온 아저씨가 차를 세워두고 투표장에 들어갔다. ⓒ 한성희
'광탄면 제5투표구투표소'라고 씌어진 종이가 붙어있는 교문을 지나 자그마한 운동장에 도착해 차에 내렸다. 한 쪽에 사진을 찍어주기 위한 자리가 마련돼 있고 김 교수가 서 있다.

"가만 있자. 이게 누구야? 한 기자잖아. 아이고 반가워. 얼굴도 뽀얘지고 이뻐져서 못 알아봤네요. 내가 유일하게 파주에서 기자이름 기억하는 건 한성희 기자밖에 없다고."
"왜 모른 척 하시나 했네요. 머리를 잘라서 그런가요. 뵌 지 너무 오래됐죠?"
"아냐, 정말 이뻐졌다고요."

설마? 피식 웃고 말았다. 얼굴이 '뽀얘'진 건 살이 더 쪘다는 증거지. 김 교수의 다정다감한 말과 사람을 편하게 하는 소탈함은 변함없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투표를 하고 사진찍기 봉사를 하러 파주까지 온 작가들.
아침부터 부지런히 투표를 하고 사진찍기 봉사를 하러 파주까지 온 작가들. ⓒ 한성희
"그런데 웬 사진 찍기 행사래요?"
"아이구, 말도 말아요. 내가 여기 내려와서 문화학교 세운 지가 9년이고 이젠 내 동네나 다름없는데 동네분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여기 사진작가들 불러서 한 건데…."

이 행사를 위해 이른 아침에 서울에서 투표를 마치고 영장리까지 사진작가들이 내려왔단다. 오전 10시부터 시골 동네 분들의 부부 사진도 찍어주고 동네 노인들의 영정사진도 찍었단다.

"근데 서울 언론사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투표하고 사진 찍었냐, 투표하기 전에 찍었냐를 물어보더라고요. 직접 와서 확인하라 했죠. 나 원 참, 난 이 동네 누가 나오는지도 모르는데."

물론 동네 사람들이야 투표하러 왔으니 투표를 마치고 나와서 사진을 찍었다. 김 교수는 주소지가 이곳이 아니라서 투표를 할 수도 없다. 선거에 무슨 영향이 있나 싶어서 그 언론사 기자는 그렇게 캐물었을 것이다. 화를 내는 김 교수의 표정이 소녀 같아서 웃다가 물었다.

"교수님 집은 서울이시죠? 오늘 투표는 하고 나오셨나요?"
"여기 오기 바빠서 난 못하고 나왔어요. 올해는 이곳으로 아예 주소를 옮기려 해요."

"할아버지, 옷을 바로 잡아드릴게요."  영장리에 사는 박봉래(85) 할아버지가 사진을 찍기 전, 자세와 옷을 바로 잡아주고.
"할아버지, 옷을 바로 잡아드릴게요." 영장리에 사는 박봉래(85) 할아버지가 사진을 찍기 전, 자세와 옷을 바로 잡아주고. ⓒ 한성희
비영리 기관인 문화예술아카데미를 꾸려 가는 김 교수는 금요일부터 주말에 이곳에 와서 머문다. 투표를 마친 할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의자에 앉는다. 카메라 앞에 앉은 김은숙씨(28·서울 마포구 연남동)와 임은영씨(29)가 사진 찍을 준비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김 교수는 할아버지 곁으로 가서 자세를 바로잡아준다.

"휴, 이젠 기운이 없어서 투표하러 다니기도 너무 힘들어요. 내가 올해 여든 다섯이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는 할아버지의 축 쳐진 어깨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아마 이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지 않을까. 가슴이 시큰해지며 사진을 찍는 박봉래 할아버지를 지켜보았다. 뒤 이어 아주머니 한 분이 와서 의자에 앉는다. 김 교수는 언니처럼 자상하게 머리를 다듬어주고 자세를 바꿔주며 예쁘게 찍으라 한다.

"머리는 이렇게 해야 더 이쁘게 나와요."  김옥조 교수가 투표를 마치고 나온 고현숙(51)씨의 머리를 매만져 준다.
"머리는 이렇게 해야 더 이쁘게 나와요." 김옥조 교수가 투표를 마치고 나온 고현숙(51)씨의 머리를 매만져 준다. ⓒ 한성희
이날 하루 찍은 사람이 100여명. 가족, 부부, 독사진 등을 찍고 사진을 받을 주소를 적고 갔다.

"어느 50대 후반 아주머니는 결혼식 때 찍어보고 부부가 같이 사진 찍는 게 처음이라며 눈물을 다 글썽거리더라고요.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더라 싶어요. 나도 부부 사진은 거의 없는 거 같아."

요즘같이 디카가 흔한 시대에 부부사진을 찍을 기회가 없다니. 사진은 젊거나 도시사람에게는 흔하게 접할 수 있어도 시골의 나이든 사람들에겐 여전히 먼 얘기였다.

도자기 체험 교실.
도자기 체험 교실. ⓒ 한성희
"도자기 구경도 하고, 차 마시러 가끔 들를게요."
"자주 와요. 요 앞에 카페테리아를 만들 예정이니까. 거기서 차를 마시자구요."

돌아오는 길에 동행했던 친구는 돈만 쏟아 붓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게 문화사업이라고 중얼거렸다. 투표마감 시간이 다 돼 가는 저녁 무렵, 석양을 받은 은행나무와 메타세콰이어의 그늘이 운동장에 길게 늘어졌다.

덧붙이는 글 | '이 시대의 좋은 소리가 만들어 가는' 자연문화체험학교(이·시·소 문화예술 아카데미)는 3800평의 아름다운 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폐교를 활용하여 도자 프로그램으로 점토교육반, 가족체험반, 커플반, 웨딩반, 치유반 등으로 나누어 문화체험행사를 운영하며 계절 특별 프로그램으로 명사세미나(월1회) 전통음식축제(고추장, 감식초, 장아찌) 저수지 산책, 파주문화유적지 방문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이·시·소 문화예술 아카데미'는 이화여대 조형미술대학 공예학부 김옥조 교수가 세운 교육인적자원부의 학교·사회 문화예술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비영리 지정교육기관이다. 

유·초·중학생들을 위한 공예체험, 가족을 위한 주말아카데미, 영상 아카데미와 영화관도 운영한다. 이곳의 수익금의 일부는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예술사업에 투자된다. 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을 운영하며 회원을 모집해 도예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www.isisonc.co.kr

*한성희 기자는 파주시 지역언론에서 편집 취재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