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열흘 만에 종합구상을 밝혔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거의 모든 언론과 인터뷰를 갖고 부동산 정책과 추가성장 방안, 당청갈등 실상, 정계개편 방향 등을 두루 밝혔다.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 출범 후 잇따르고 있는 당 정책 정체성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중간정리에 나선 것 같다. 하지만 내용은 '대동'하고 표현은 '소이'하다. 종합선물세트가 갖는 특성인 외화내빈 현상을 되풀이했다. 쏟아낸 말은 많지만 심층적인 얘기는 별로 없다. 여물지 않았다는 느낌마저 준다.
김근태 의장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반한나라당 연합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의외다. 열린우리당이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다른 신문을 보니 얘기가 약간 다르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선 "단순히 반한나라당 연합만으론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고 했고,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선 "반한나라당 연합으로만 가는 것은 부족하다"고 했다.
'반한나라당 연합'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비전과 패러다임"이 같이 제시돼야 한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연합은 필요하되 연합의 명분이 '반한나라당'이 아니라 '새로운 비전과 패러다임'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뭘까? 김근태 의장은 '중도실용'을 표방한 고건 전 총리에 대해 "미래비전 실현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치개혁과 추가적인 경제성장에 대한 대안"을 꼽았다. 예의 추가성장론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김근태 의장이 취임과 동시에 내놓은 추가성장론은 최대 80조원에 달하는 기업의 여유자금을 투자로 유인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낸다는 것이었다. 그럼 이 방안을 열흘 동안 얼마나 숙성시켰길래 인터뷰를 자청했을까?
추가성장론, 얼마나 '숙성'됐길래...
김근태 의장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재벌의 이른바 오너라는 사람들이 국민으로부터 위탁경영을 받고 있다는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부족하다. 소명의식을 요구하고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대신 경영권은 보장해줘야 한다. 그것을 단순한 규제완화나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로 접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무슨 말인가? 좀처럼 실내용에 다가서기 어렵다. 오히려 혼란스럽다.
재벌 오너에게 위탁경영을 받고 있다는 소명의식을 요구하고 제도화하는 방안은 뭔가? 달리 말하면 경영의 공공성 제고, 즉 경영의 사회적 통제를 강화한다는 뜻이다.
이건 이미 시장이 인정하고 시행하는 방안이다. 국민이 주식시장을 통해 기업의 주식을 자유롭게 사고팔고, 주식의 권리를 주주총회장에서 행사한다. 기존 경영진이 회사에 심대한 손실을 끼칠 경우 주주들이 뜻을 모아 경영권을 박탈한다. 대주주의 횡포에 맞서 소액주주의 경영감시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기도 한다. 집단소송제나 법무부가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이중대표소송제가 그 예다.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김근태 의장은 이 점을 특히 강조하면서도 뒤에 가선 다른 얘기를 했다. "경영권은 보장해 줘야 한다"고 했다. 신군부가 경영권을 강탈한 것과 같은 극단현상이 재연하지 않는 한 정치권이 나서서 경영권 보장을 강조할 이유는 없다.
현정은 회장과 '범현대가'가 벌이는 현대상선 경영권 분쟁에 대해 정부가 나서서 감놔라 대추놔라 할 수 없듯이 정부가 나서서 재벌의 경영권을 포괄적으로 보장해줄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건 주주 몫이다.
혹시 집단소송제나 이중대표소송제, 더 나아가 출자총액제한제, 금융산업구조개선법 등의 재검토를 시사한 걸까? 하지만 김근태 의장은 "단순한 규제완화나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다른 경우, 즉 재벌의 산업규제를 풀어 '경영의 자유'를 확대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 또한 아니다. 김근태 의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 정부가 산업정책으로 적극 개입하고 뒷받침해야 한다”고 했다.
이도 저도 아니면 도대체 뭔가? 눈을 돌리자. 김근태 의장은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를 흉내 내다 실패했다며 제3의 길을 주장했다.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산업발전 전략을 추진한 네덜란드, 아일랜드, 스웨덴 등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오락가락' 김근태의 제3의 길
이런 얘기를 접하니 퍼뜩 떠오르는 사례가 있다. 지난해 3월 체결된 '반부패 투명사회 협약'이다. 기업의 이전 잘못을 털어주는 대신 기업은 투명경영과 투자활성화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이 협약 체결 직후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 총수들과 회동을 가졌고, 석가탄신일엔 기업인들을 사면해줬다. 이어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대화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아진 건 별로 없다. 1년을 흘려보내는 사이에 현대차 비리사건과 두산 총수일가 횡령사건이 터졌고, 80조원의 여유자금은 재벌 금고에서 잠자고 있다.
그뿐인가. 참여정부 또한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대통령과 총리가 나서서 미래 국가 전략 수립을 위한 사회연석회의 구성을 제안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대타협의 한 축인 이른바 '서민'에 제시하는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근태 의장도 이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 재벌을 향해서는 경영권 보장과 같은 상대적으로 구체화된 '당근'을 제시했지만 서민을 향해서는 복지 확충, 일자리 창출의 원론만 되풀이 언급했다.
한미FTA의 급속한 추진을 경계하는 발언을 하긴 했지만 원천 반대는 아니다. 그럴 경우 추가성장은 고사하고 '기존 성장' 기조마저 무너뜨리지 않느냐는 반론에 직면할 수도 있기에 원천 반대를 주장하기도 쉽지 않다. .
현실은 이렇다. 불신은 뿌리 깊고, 약속은 가벼우며, 실천은 지지부진하다. '일거 해소책'을 제시하기엔 현실의 벽이 너무 두텁고 높다.
김근태 의장은 가장 어려운 얘기를 꺼내들었다. 이율배반의 논리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이해력 부족'을 탓한다면 할 말 없지만 그런 현상을 야기한 이는 김근태 의장이다. 그는 총론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이율배반의 논리를 던지기만 했을 뿐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주지 않았다.
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는 가을 정기국회가 끝날 때까지 정계개편 논의를 중단하기로 했다. 연말까지는 대선 필승전략, 즉 '새로운 비전과 패러다임의 연합' 구상을 가다듬을 수 있다.
열린우리당이 가야할 '제3의 길'
그러니 너무 다그치지는 말자. '민주개혁'이나 '미래평화'와 같은 '흘러간' 담론으로 반한나라당 연합을 구축하는 게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 즉 추가성장론을 통해 한나라당 이외의 세력을 아우르겠다는 김근태 의장의 총론에 시비를 걸 이유는 없다. 문제는 각론이다 .
김근태 의장은 각론의 구성방식을 '정책의 조합'으로 표현했다. 조합이 절충이 되고 절충이 타협으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궁금하지만 제쳐놓자. 더 궁금한 게 있다. '새로운 비전과 패러다임의 연합'이 제시할 정책의 조합이 과연 한나라당 이외의 세력을 연결시키는 접착제가 될 수 있을까? 오히려 한나라당 정책의 아류로 평가절하될 여지는 없을까?
한나라당과 정책 차별성을 분명히 하면서, 참여정부의 신자유주의 길은 피하면서, 두루 잘 먹고살게 해줄 길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제3의 길'이이요, 새로운 리더십의 창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