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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는 한 달에 두 번씩 야채 꾸러미를 자동차에 가득 싣고 사람들 많은 대전시내 한복판으로 나섭니다.

아내와 나는 이른 아침부터 이슬 내린 산비탈 밭에서 케일이며 부록콜리, 상추, 아욱, 근대 등 10가지가 넘는 야채를 수확하여 2만 원짜리 박스를 만듭니다. 거기에 집에서 직접 담근 된장이며 고추장, 청국장, 오디 잼 등을 한 가지씩 끼워 넣습니다.

수확한 야채 하나하나를 각각 포장하여 10개의 박스를 다 만들고 나면 오후 4시가 훌쩍 넘습니다. 자동차에 야채 박스를 실을 무렵이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옵니다.

▲ 함께 야채 배달을 다니는 우리집 촌놈들.
ⓒ 송성영
"오늘은 누가 갈껴? 저번에 인효가 갔으니께 오늘은 인상이가 갈까?"

나는 우리 집 촌놈들에게 세상 구경도 시켜 줄겸 우리가 재배한 야채들을 어떤 사람들이 먹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매번 한 놈씩 차례로 데려 가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작은 아이 인상이가 기분 좋게 따라 나섰습니다. 평소 엄마가 앉던 조수석 서랍에서 이것저것 꺼내보던 녀석이 그럽니다.

"아빠 돈 있어?"
"아까 3만원, 기름 넣고 하나도 없는디 왜?"

"만두 얼마여?"
"먹구 싶어?"
"응, 이렇게 둥그런 거 있잖어, 한 접시에 얼마여?"
"한 3천원 정도 할 걸."

녀석은 차안 구석구석에 박혀 있던 지폐와 동전을 꺼내 셈 하고 나더니 그럽니다.

"에이, 3천원이 쪼금 안 되네."
"있다가 야채 팔믄 돈 생길 꺼거든, 그 돈 받아서 사먹자."

초등학교 4학년생인 녀석은 요즘 한창 잘 먹습니다. 금방 밥 먹고 뒤돌아서서 뭔가 먹을 것을 찾곤 합니다.

"아빠, 있다가 사람들 한티 야채 사세요, 야채 사세요 해야 돼는겨?"
"엉? 그래야지, 아빠는 길거리다가 야채 펼쳐놓고 니가 그래야 하는디? 할 수 있겠어?"
"아니 못 할 거 같어…."

"그럼 만두 못 사 먹는디, 니가 불쌍한 얼굴로 지나가는 아줌마들 치맛자락 붙잡고 아주머니 제발 우리 야채 좀 사가세요, 우리 야채 끝내주게 맛있어요, 사정 사정해야 하는디."
"못 할 거 같어…."

맛있는 '만두의 꿈'을 꾸고 있던 녀석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표정조차 우울해졌습니다. 나는 얼른 사태를 수습합니다.

"아녀, 그렇게 하지 않아두 돼, 아빠가 장난으로 한 말여, 그냥 배달만 해주면 어떤 아저씨가 돈 줄껴 그때 맛있는 만두 사먹자."

대전에 야채를 배달해야 할 곳은 모두 다섯 군데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아파트에는 사람이 없어 경비실에 맡겨 놓습니다. 한 집은 이미 선금을 지불해 놓은 상태였고 다른 집들은 온라인 통장으로 지불하기로 약속돼 있습니다.

"아빠 왜 돈 안 받았어?"
"저금통장으로 준대."
"그럼 만두는 언제 먹는 겨?"

"배고파? 학교에서 점심 안 먹은겨?"
"먹었지. 근디 만두가 자꾸만 먹구 싶어. 내 마음이 자꾸만 먹구 싶대."
"그람 니 마음한티 조금만 참으라구 혀."
"그럴게."

네 번째 배달지인 김 선생의 기획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한꺼번에 다섯 박스를 배달해 주는 곳입니다. 자동차를 멀찌감치 세워두고 나는 박스 네 개를, 나머지 한 개는 인상이 녀석이 들고 낑낑거리며 뒤따라 왔습니다.

김 선생은 좋은 야채를 배달해 줘서 고맙다며 꼬박꼬박 좋은 차를 내놓습니다. 평소 현금을 내주곤 했는데 그날따라 김 선생 역시 야채 값을 온라인 통장으로 넣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사람들이 왜 고맙다구 해?"
"꽁짜로 주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고맙다고 하지? 그래서 아빠가 농사짓는 겨. 고맙다고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이 고마워서 신나고 재밌게 농사 짓는 겨. 근데 돈을 못 받아서 어떻허냐? 마지막 한 곳이 남았거든, 거기 가믄 돈이 생길 껴, 참을 수 있겠지?"
"배고픈데…."

다섯 번째 배달지에 도착하자 저녁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녀석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마지막 배달지에서 박스 한 개 값인 2만원을 챙겨 나왔습니다. 하지만 차를 몰고 주변을 빙빙 둘러보아도 만두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냥 제과점 빵 사먹을까?"
"제과점 빵이 먼데?"
"우리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사오는 야채 빵이나 크림빵 같은 거 있잖아, 아까 형아가 빵 사오라구 했던…."
"아, 그거, 근데 빵은 별론데, 그냥 짜장면 사먹자."

"이제 만두는 싫어?"
"싫은 건 아닌데 그냥 짜장면 먹구 싶어."
"왜 갑자기?"
"아까 학교에서 만화책 봤는데 짜장면 먹는 장면이 나왔거든 갑자기 그게 생각나서."
"그려, 그람 형아 빵 사다주고 집 근처에 있는 짜장집에 가자."

때마침 자동차를 세워놓을 만한 도로가에 제과점이 있었습니다. 제과점에서 빵을 고르고 있는데 녀석이 불쑥 그럽니다.

"아빠 모처럼 만에 햄버거 먹구 싶어."
"그려? 그럼 너는 햄버거 먹어."

나는 크림빵 두 개로 배를 채우고 녀석은 평소 접하지 않는 햄버거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다 먹고 나서 곧바로 후회를 합니다.

"나는 빵보다 밥이 더 좋아."
"왜? 빵도 맛있잖어."
"빵은 금방 질리는디, 밥은 매일 매일 먹어도 안 질리잖어."

어려서부터 세상에서 밥이 제일 맛있다 했던 '밥돌이' 인상이 녀석. 엄마 아빠 좋은 이유를 '아빠는 돈 벌어 주고 엄마는 밥해주니까'라고 했을 정도였는데 지금도 변함없습니다('인상'이가 밥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 2003-02-06 기사에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에이 씨, 괜히 햄버거 먹었네."
"배불러?"
"아니, 그냥 속이 안좋아."
"짜장면은 어떻게 하구?"
"그래도 이따가 장순루에 가서 짜장면 먹을껴."

자장면 타령을 하던 녀석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자동차 등받이에 어깨를 파묻고 곤히 잠 들었습니다. 촌놈이 빌딩숲을 헤집고 다니는 일이 무척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집에 가까워지자 밤 8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인상아 다 왔다. 장순루 가서 짜장면 먹으러 가야지?"
"아빠도 먹구 싶어?"
"아니, 니가 먹으면 먹구."

"아빠도 짜장면 먹구 싶냐구."
"니 맘대루 혀."
"아빠 맘대루 해, 아빠가 먹으면 나도 먹을게."
"아니 니가 먹으면 아빠도 먹을껀데."

"나는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아."
"니가 먹구 싶으면 먹구 싶다고 하지, 왜 맨 날 너는 누구 맘대로 하라구 해."
"내 맘대루 하면 다른 사람이 기분 나쁠 거구, 그러다가 서로 싸울 수도 있잖아."
"하하하. 어이구, 우리 인상이가 다 컸구나!"

결국 그 날 녀석은 원하던 만두는 물론이고 자장면조차 먹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은 먹지 못하고 원치 않은 햄버거로 적당히 배를 채운 인상이 녀석. 집에 돌아오자마자 돈 벌고 돌아온 가장처럼 기분 좋게 큰 소리칩니다.

"엄마 밥 줘!"

덧붙이는 글 | 월간 <자연과 생태> 7월호에 송고한 기사를 수정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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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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