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런'(上海人)들은 이미 150여 년 전부터 태평양을 건너온 서양 탐험가, 사업가들이 벌이는 각종 사업과 말초적인 서양식 문화를 보고 배우며‘서양 따라하기’에 빠르게 돌입한다.
개항이후 상하이에는 가스, 전기 등 근대도시를 규정하는 기초산업이 들어왔다. 또 자동차, 전차, 공공버스 등 편리한 교통수단이 상하이 시내를 운행하면서 서양식 도시구조를 만들어 나간다.
도시발달과 더불어 서양문화도 유행하기 시작한다. 화려한 서양식 댄스홀, 프랑스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스탠드바 스타일의 커피숍, 파마기를 설치한 서양 미용실, 드레스를 맞추어주는 양장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중국 속 서양 문화도시’로 변모해 나간다.
'중국 속 서양도시' 상하이
이처럼 상하이가 서양도시로 급격히 변모한 이유는 태평천국(1851∼1864년) 시대의 활동 근거지인 광저우(廣州)의 대체 지역으로 떠오르면서부터였다. 물자수송과 교역거래가 늘어나며 새로운 무역항구로 각광받자 외국인들이 대거 몰려들어오면서 시작된다.
1849년 중국 상하이로 진출한 서양인들은 그들의 거주지인 징안스(靜安寺)에 대규모 경마장 개장을 시작으로 서양식 위락도시로 변모시켜나간다. 이미 1865년에 가스가 들어와 난징동루에 가로등이 설치돼 밤거리를 밝혔으며 1882년에는 외국 전기회사가 호롱불 대신 전등을 켠다.
교통수단도 일찍 들어온다. 1895년도에 최초의 자동차가 상하이 시내를 다니고, 1908년에는 경마장이 들어선 징안스에서 외국회사 사무실이 많은 와이탄까지 전차가 다니기 시작한다. 1922년에 이르러서는 최초의 공공버스가 생겨나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시에 차량을 통제하는 교통통제소가 와이탄 강변에 생겨날 정도였다.
1930년대 초에 상하이 인구 300만 명 중 7만 여명이 외국인들로 채워져 그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다인종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다. 또한 아시아에서 최고 높은 고층빌딩이 들어선 건축도시였다. 1932년 상하이는 런던, 뉴욕, 파리와 더불어 세계 5대도시에 들어갈 정도로 교통수단, 도시기초 기간시설, 고층건축물, 문화시설 등이 늘어났다.
댄스홀, 공연장 등 서양문화 절정
1908년부터 서양문화는 절정기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서구식 영화관이 개관되고, 차에 스크린을 단 이동식 영화차량이 난징루 거리에서 길거리 영화 상영을 한다. 댄스홀에는 왈츠 춤을 추는 남녀들로 넘쳐 났고, 샴푸·서양비누·서양담배·서양 라이터·서양 장식품 등을 파는 서양식 가게들이 호황을 누렸다.
당시의 대표적인 서양식 대형 유흥위락시설로는 징안스(靜安寺) 맞은편에 현재도 그 모습 그대로 서있는 바이러먼(百樂門) 구락부와 인민광장 동쪽 편에 과거 모습 그대로 세워져 있는 다스제(大世界)가 있다.
바이러먼은 당시 부유층이 즐겨 찾던 사교춤을 추는 댄스홀로 서양 춤을 배우려는 중국인과 외국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대규모 공연장인 다스제에서는 연극, 전통가극, 무용을 보러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외국인 중에는 정상적인 무역사업가도 많았지만 마약 밀매자, 폭력배, 범법 탈출자 등 자국에서조차 파렴치범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기회를 잡고자 상하이에 들어왔다. 이들로 인해‘상하이 서양문화’는 떠돌이 문화, 이국문화, 매춘문화 등이 혼재되었다.
영화산업의 꽃을 피운 상하이
상하이는 특히 영화산업이 발달하면서 호황을 누린다. 지식인과 서민이 즐겨 찾던 극장으로는 루쉰이 즐겨 찾았던 따광밍(大光明) 극장이 있다. 이외에도 상하이에는 크고 작은 서양식 극장들이 많았다.
상하이 영화산업의 뿌리는 깊다. 1920∼30년 당시 중국은 영화산업이 꽃을 피우는 시기였으며 상하이는 영화산업의 중심지였다. 세계 최초의 영화가 1895년 파리에서 상영되었는데 1905년에 중국으로 영화가 전해졌고, 1908년 최초 영화관이 상하이에 개관됐다.
영화관 개봉 초기에는 유료상영을 하였는데 유료영화 관람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의 실정을 고려하여 상하이에 진출한 외국 영화사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낸다.
극장에 들어온 관객들에게 영화의 초반부만을 먼저 상영해주고 중간에 영화 상영을 잠시 중단한 후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관람료를 수금한 뒤 나머지 영화를 상영하였다. 본 영화 상영 전에 예고편을 보여주는 영화관 운영방식의 원조인 셈이다.
1930년에 상하이 사람들이 ‘영화중독증’에 빠지면서 영화사가 무려 141개나 생겨났고, 영화관도 35곳, 히트작의 관객은 수십만을 넘었다. 영화제작 편수도 영화사 수만큼이나 늘어나 그야말로 상하이는 국제적인 영화도시가 된다.
지금도 상하이 소재 고급 음식점에 가면 당시 사용하던 촬영기자재를 장식품으로 전시해 놓은 식당이 있다. 유명한 골동품 거리인 동타이루(東台路) 골동품 상가에 가면 낡은 촬영기자재 부속들이 진열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
영화산업이 발달하자 유명 인기 배우들도 많이 배출된다. 롼링위, 저우쉬안, 자오단을 비롯하여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왔던 한국인 남성배우 진옌(金焰) 등 유명배우들이 상하이에서 탄생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이었던 여배우 쟝칭(江靑)도 상하이에서 배우로 활동을 한 여성이다.
영화산업 성장과 함께 상하이 사람들의 생활도 변해갔다. 서양식 소비문화를 선망하게 되면서 영화의 장면에 나오는 머리 모양을 하고자 서양미용실을 찾아 파마를 하고, 서양 생활 공산품을 찾게 된다. 지금 중국 젊은이들이 한류(韓流) 스타들 헤어스타일을 모방하듯이 당시도 그러했다.
'체념하는 패배자'의 도시 상하이
상하이는 1842년 개항시기부터 1943년 왕웨이(汪僞) 정부가 서구열강으로부터 조차지를 반환 받는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양인들에 의해 서양도시로 성장하면서 ‘동서양의 환상적 결합도시’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조차지인 상하이를 당시 바라보며 살아가던 대다수 상하이 중국인들은 마치 루쉰의 <아Q정전>에 나오는 주인공 아큐처럼 살았는지 모른다.
1936년에 일본의 조차지역인 홍커우(虹口)에서 숨어살다 운명한 중국의 문학거장이었던 루쉰이 그린 아큐는 식민지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피압박적인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을 위로하며 ‘체념하는 패배자’로 현실세계를 살았다.
'동방의 파리', '일확천금의 도시', '마약의 도시', '환락의 도시'라는 명칭부터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의 도시', '혁명의 도시' 라는 명칭으로 불린 상하이는 여러 모순을 지닌 채 식민지시기를 보낸다.
덧붙이는 글 | [상하이 역사 돌아보기]는 3회에 나누어 연재를 할 예정입니다. 참조자료 및 도서로는 상하이전시관 자료,브리테니커 사전, 복단대학 발행 상해도시여행, 안그라픽스 상하이 등 입니다.
이 기사의 사진들은 '상하이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밀랍형 구조물들을 찍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