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5일 세계 최고 갑부 빌 게이츠가 미국을 깜짝 놀라게 하는 발표를 했다.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 사를 창설한 후 이제까지 전 세계적으로 부동의 입지를 고수하던 빌 게이츠가 앞으로 2년 후인 2008년 7월 31일자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매일매일 하던 업무를 파트 타임으로 줄이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빌 게이츠의 일선 후퇴 이유다. 빌 게이츠는 이번 결정이 "자신의 여러 업무 중 우선 순위를 재배치하는 것"이라면서 앞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사업 대신 자선 사업을 가장 중요한 일로 삼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 후 2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부자인 워렌 버핏이 빌 게이츠의 뒤를 따르고 나섰다. 발군의 투자가로 막대한 부를 이룬 버핏은 미국 현지 시간으로 6월 26일 자신의 총재산 중 80%가 넘는 370억 달러를 자선사업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도대체 미국 부자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런 갑부들의 기부 열풍은 최신 유행인가?
록펠러... 카네기... 게이츠... 버핏... ?
사실 미국 부호들의 기부 문화가 21세기 들어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20세기에도 록펠러나 카네기 등은 미국의 기부 문화에 길이 남는 자취를 남겼다. 특히 카네기가 기부한 재산으로 세워진 공공 도서관들은 지금도 미국 곳곳에 건재하다.
그러나 빌 게이츠의 이번 결심은 확실히 새로운 시대의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걸어온 행보와 그가 가진 잠재력이 큰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6월 중순 빌 게이츠가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딴 빌과 멜린다 게이츠 재단(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에 앞으로 주력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미국 언론의 반응이 이런 기대를 반증한다.
6월 16일자 공영방송(PBS) 뉴스에 나온 <포천 매거진>의 데이빗 커크패트릭은 성공한 사업가 빌 게이츠가 앞으로 주력할 자선 사업에서도 성공을 거둘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빌 게이츠는 아주 목표가 확고하고 부지런하다. 또 아주 현실적이고 전략적이다. (중략) 그는 우리가 여태 보지 못 했던 집중력과 부지런함을 자선 사업에서도 보여줄 것이다. 재단일을 하면서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할 때처럼 공격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다."
한편 <자선사업 크로니클>(The Chronicle of Philanthropy)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는 스테이시 팔머는 빌 게이츠의 이번 결정을 미국 자선 사업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본다.
"빌 게이츠는 전통적 기부 문화에 아주 다른 변화를 불러 올 것이다. 왜냐면 그는 사물을 다른 식으로, 새롭게 보고 자선가로서는 아주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보통 자선 사업을 하는 재단은 부자가 죽으면서 남기는 유산으로 시작하고는 했다. 따라서 기부하는 사람이 직접적으로 자선 사업에 관여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게이츠 부부는 아주 다르다."
또 관계자들은 빌 게이츠의 막대한 재산도 재산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번 결정이 다른 부자들의 귀감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빌 게이츠의 절친한 친구인 워렌 버핏이 빌 게이츠의 노력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이 외에도 뉴욕 시장이자 대부호인 블룸버그 등 다른 부자들도 자선 사업을 통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미국에서는 요즘 부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세우고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야에 기부를 하는 것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물론 이면에는 자선이나 기부를 하면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시각도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빌 게이츠의 경우를 보면 그의 진심 어린 행보를 엿볼 수 있다.
우리 시대 최고 갑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게이츠 재단은 지난 2000년 세워졌다. 재단이 설립될 당시를 돌이켜보면 그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 사는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윈도' 시리즈로 재계에서 부동의 세계 1위자리를 굳혔으나, 그 자리를 따내고 지키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가 저지른 독과점에 가까운 기업 행위는 전 세계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게이츠 재단이 창설됐을 때 일각에서는 이미지 제고를 위한 면피용이라고 보기도 했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그동안 자신의 재산 중 반을 재단에 기부했다(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세계 최대 갑부다! 1999년 그의 재산은 1000억 달러가 넘었다. 현재 그의 재산은 500억 달러 쯤 된다. 세계 갑부 순위에서 제2위에 기록된 워렌 버핏의 재산은 440억 달러로 추산된다. 이 중 버핏은 370억 불을 내놓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게이츠 재단은 그동안 진화를 거듭해 왔다. 설립된 초기에는 빌 게이츠의 전문 분야인 컴퓨터 쪽에 국한된 활동을 했다. 도서관에 컴퓨터를 지원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간 활동 분야를 넓혀 지금은 교육과 세계 보건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다.
특히 보건 쪽으로는 국경을 넘어서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 국가들에 AIDS 치료를 위해 많은 지원을 보낸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게이츠 부부는 작년 말 <타임즈>에서 뽑은 2005년 올해의 인물로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빌 게이츠의 변화의 핵심은 그저 돈을 주는 수동적 기부에서 벗어나 자신의 세계적인 인지도를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뛸 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됐다는 데 있다.
이번에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업무를 파트타임으로 줄이고 게이츠 재단 일을 풀타임으로 하겠다는 발표를 하며 게이츠는 자신의 부가 사회와 맺는 관계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MS(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성공으로 나는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많은 재산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부를 사회에 돌려줄 책임이 있고 또 최선의 방식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모든 미국 부자들이 빌 게이츠와 같은 의견을 가진 것은 아니다. 미국의 상속세 논란이 한 예다. 미국에서는 이제까지 2백만 달러 이상의 재산을 남기고 죽은 후 그 재산 상속시 46%의 세금이 부과됐다.
거액 기부해도 부자로 남을 수 있는 사람만?
이를 두고 공화당을 중심으로 상속세를 아예 완전 폐기하자는 움직임이 거셌다. 그리고 최근 의회에서는 기존의 46%의 세율을 대폭 삭감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에서 볼 수 있듯 모든 미국 부자들이 카네기, 록펠러 때부터 내려온 미국 부자의 전통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재산의 반, 더 나아가 80%를 기부해도 대부호로 남을 수 있는 부자들만이 기부에 너그러울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이번 행보가 미국의 기부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것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