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배 법무장관의 각오가 대단하다. 탈세사범을 발본색원하겠다고 했다.
"탈세는 회계부정이나 횡령, 뇌물 등 다른 범죄와 연결되는 기업비리의 원천이자 지하경제 확산의 주범인 중대한 반사회적 범죄"라며, 탈세전담 수사부를 만들겠다고 했다.
토를 달 이유가 전혀 없는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사가 꼬인다. '그러면 뭐 하나'란 말이 절로 나온다.
천정배 법무장관이 기업비리의 원천인 탈세 근절을 역설한 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는 현대차 비리사건의 주범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을 풀어줬다.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기 때문에 불구속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다.
말은 맞다. 증거 인멸, 즉 구속 사유가 없다면 굳이 가둬둘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몽구 회장이 법정에서 비자금 부분에 대해 자신의 형사책임을 '원칙적으로 인정'했고,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 및 압수수색 등이 완료돼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게 법원의 설명이다.
'원칙적인 인정'이 뭘 뜻하는 것이기에 '시인'이란 표현을 대체했는지 의아하지만 제쳐놓자. 더 중한 게 있다. 정몽구 회장이 '원칙적으로' 인정한 건 비자금 조성부분이다. 반면 비자금 사용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고, 압수한 회사 문서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비자금 사용 의혹의 줄기는 두 개다. 김동훈 전 안건회계법인 대표를 통해 계열사 채무 탕감 로비에 뿌린 비자금 중 14억원의 행방이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2002년 대선 직전 집중 집행된 1000억원이 넘는 비자금의 경로에 대해선 아예 나오는 얘기가 없다.
이런 상태에서 정몽구 회장이 사실상 자유의 몸이 돼 버렸다. 입을 맞출 여지, 다시 말해 증거 인멸의 여지가 커진 것이다.
증거인멸 우려 없다면서 국민 여론은 왜 살폈나
그래도 제쳐놓자. 따질 게 따로 있다. 정몽구 회장을 보석으로 풀어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의 재판장이 기자들에게 이렇게 심경을 밝혔다고 한다.
"고민이 많아 며칠 밤을 못 자고, 수면제를 먹기까지 했다. 신분을 안 밝히고 택시기사에게도 물어보고, 주변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하다못해 인터넷 댓글도 참조했다."
이해할 수 없다. 보석 여부를 판단하는데 왜 국민 여론을 살펴야 하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했다면 법 논리를 따르면 그만 아닌가?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확신했다면 인권 보호의 법 정신에 따라 불구속 원칙을 택하면 그만이었을 것을, 왜 밤잠까지 설쳐야 했을까?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면 또 다른 보석 허가 사유로 밝힌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나 현대차의 선진 경영시스템 구축을 고려할 이유조차 없지 않았을까?
재판장의 고민거리는 이것이었다고 한다.
"이번 사건보다 못한 사건도 구속돼서 재판받는 경우가 많은데 재벌 회장이라고 특혜 주는 것 아닌가 하는 시각에 대해 제일 많이 고민했고 그게 가장 힘들었다."
이 고백을 접하니까 새삼스레 다가오는 말이 있다. 법원이 정몽구 회장을 보석으로 풀어준 날 국회 청문회장에 선 전수안 대법관 후보자는 이렇게 말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완전히 허구라고 말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는 법관으로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