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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잡아올린 고기를 손질하는 맹골도 어민들
갓 잡아올린 고기를 손질하는 맹골도 어민들 ⓒ 곽의진
섬으로 이루어진 진도에서도 가장 서쪽 조도면은 거차군도, 맹골군도로 이어지는 섬들이 바다위에 널려있다.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맹골도에서는 이른 새벽이면 중국에서 우는 닭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맹골도와 관련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뒤부터 맹골도는 먼 환상의 섬 같은 곳이 되어 있었다. 서남해에 흩뿌려져 있는 그 수많은 섬들 중에서도 가장 먼 곳에 있는 맹골도는 그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가보고 싶은 열망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몇 번인가의 일정을 머릿속에 그리며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상상속에만 남은 채 글을 쓰게 되었다.

맹골도가 있는 조도(鳥島)면은 섬들이 새때처럼 많다는 뜻으로 생긴 지명인데 이 조도라는 의미처럼 무수한 섬들이 이 일대에 흩뿌려져 있다. 진도에서는 정기항로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목포에서 여객선을 타면 5시간이상이 걸리는 멀고도 먼 오지낙도의 섬이다. 지금도 맹골도에 가려면 아주 큰맘 먹고 가야할 만큼 먼 섬이다.

그런데 해남윤씨가에서 펴낸 <해남윤씨문헌> 기록을 보면 윤홍중<1518(중종 13)~1572(선조 5)>이 이곳 조도면의 맹골도와 죽도, 곽도를 매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이 오지의 섬을 무엇 때문에 매입 하였을까, 가지고 있는 땅만 하여도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해남윤씨가에서 그것도 이 먼 오지의 섬을 굳이 매입하려 했다는 것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윤홍중이 매입한 맹골도에 대해서는 해남윤씨가 소장의 문헌목록 중에서 '맹골도'관련 문서를 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하 초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문서들은 맹골도에 관한 것이 30여건 이상 남아있다. 이 맹골도는 400여년간 윤씨 종가에서 소유하여 오다가 현 종손의 조부인 윤정현(1882~1950)의 동생 대현(大鉉))의 채무상환을 위해 1936년경 어업조합에 매도하였다고 한다.

맹골도 선착장 앞의 전경
맹골도 선착장 앞의 전경 ⓒ 곽의진
매가 많아 매응골도

맹골도의 위와 아래에는 죽도와 곽도가 있어 '맹골3도'라 부르기도 하는데 맹골도에는 20여가구 40여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생활은 주로 자연산 미역이나 톳, 김 등을 채취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이러한 생활은 아주 오래전의 생활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맹골도라는 이름은 맹골도, 죽도, 곽도 등 섬과 간댓여, 아랫여, 웃여 등 많은 여가 대부분인 바위섬들로 이루어졌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섬에는 매가 많다하여 '매응골도'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매응골도'란 이름으로 표기되고 있다. 1400년경에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고 전하며 현 주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간 사람들의 후손으로 보고 있다.

윤홍중이 임진왜란 이전 사람인 것을 보면 아마 그 이전에 맹골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윤홍중이 섬을 매입한다면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 훨씬 경제적 가치가 크기 때문에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을 사지 않았나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맹골도는 근대에 와서 한차례 아픔을 겪기도 하는데 서남해의 섬들이 일제하에서 소작쟁의 운동이 일어나듯이 섬 주민들과 지주인 해남윤씨 종가사이에 세금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분쟁의 중재자는 일본인이다. 1905년 섬 주민 이근성, 이진경, 최종학 등은 죽도 등대장 일본인 장등(長藤)의 힘을 빌어 그동안 해남윤씨가의 무거운 세금을 줄일 수 있었다고 하며, 1917년 지선어장 3종 어업권을 취득한 기록이 보인다.

근대화 과정에서 섬 주민들의 자각과 함께 그동안 문서화 되지 못하고 암묵적으로 묵인되어왔던 소유권에 대한 주장이 새롭게 정리 되면서 이러한 분쟁이 발생한 것으로 보여 진다. 당시 근대화 과정에서 작성된 토지문서나 지적도, 어업면허 등의 문서는 당시의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맹골도 전경
맹골도 전경 ⓒ 곽의진
맹골도 문서에는 당시 맹골도 주민들의 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기록들이 담겨있어 새삼 기록의 중요성이 느껴지며, 이 문서 기록을 통해 그동안 맹골도가 해남윤씨가의 소유였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해남윤씨가는 토지를 경영하듯이 바다에서 나는 각종 해산물을 채취하여 이를 세금으로 바치게 하였다. 바다를 통해서는 곡물대신 수산물이 바쳐졌음을 알 수 있으며, 근대에 까지 이곳에서 나는 수산물이 종가에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호남 3걸인 윤구는 윤홍중(弘中), 윤의중(毅中), 윤공중(恭中) 3아들을 낳았는데, 윤홍중(尹弘中)은 첫째 아들로 1511년(중종 35)에 사마별시(司馬別試)를 거쳐 1546(명종 1)에 별시 병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禮曺正郞), 영광군수(靈光君守)를 지낸 인물이다. 윤구의 여(딸)는 이중호(李仲虎)의 사위가 되었는데, 이중호는 동인의 대표인물인 이발(李潑)의 아버지로 이발은 윤의중과 함께 대표적인 동인의 입장에 섰던 인물이다.

해남윤씨가는 전형적인 문인 사대부가였지만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윤홍중은 여러 문헌들을 살펴볼 때 무인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미암일기>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남윤씨가에서 펴낸 <녹우당의 가보>에 보면 윤홍중이 "호무(豪武)한 기질로서 을묘왜변(乙卯倭變)때에는 해남현감을 도와 성(城)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그 결과 장흥, 보성, 낙안 등지가 왜적의 피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을묘왜변(달량진 사변)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 전인 1555년(명종10) 5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일본 대마도 해적들이 병선 60여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해안에 쳐들어와 노략질 하였다.

이때 왜구는 달량진(현 해남 남창)을 함락하고 진격을 거듭하여 장흥부사 한온과 강진병영의 병마절도사 원적을 죽이고 영암군수 이덕견을 사로잡아 갔으며, 또다시 어란진과 진도의 금갑진도 짓밟아 살인과 약탈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해남읍성만은 현감 변협의 지략과 군민들이 힘을 합해 끝까지 성을 지켰는데,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전주부윤 이윤경과 함께 나주에서 적을 퇴치하였다. 이때 싸움에서 변협은 물러서려 하였으나 윤홍중은 의로써 읍성을 지키고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달량진 사변이 진압된 후 조정에서는 큰 공을 세운 이윤경을 전라감사로 승진시키고 해남현감 변협은 장흥부사로 승진 발령하였다. 이때 해남성 수성의 공훈을 기리고자 동헌(군청) 안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현재 천연기념물 4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윤홍중과 관련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명종 17년(1562년) 4월 12일 전 영광군수 윤홍중을 강진에 유배 보낸 사실이 나온다.

맹골도 선착장
맹골도 선착장 ⓒ 곽의진
"전 군수 윤홍중을 강진에 유배했다. 윤홍중이 숙의(淑儀) 신씨(申氏) 본가 옆에 있는 집을 샀다가 담장문제로 싸움이 벌어져 숙의의 집 여종을 붙잡아다 매질을 하였다. 숙의의 집에서 숙의에게 호소를 함에 상이 가만히 숙의의 집으로 하여금 형조에 고소를 하게했다. 이렇게 해서 사헌부가 윤홍중을 논박하여 금부에 가두었고 마침내는 유배를 모내고 만 것이다.

윤홍중은 원래 광망하고 술을 많이 마시는 인간이니 애석할 것이 없다. 그러나 숙의의 집의 사사로운 혐의 때문에 조정의 선비를 유배 보내었으나 이는 여알(女謁)의 성행을 돕는 것이다."

윤홍중이 유배를 간 것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조금은 성질이 급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와 함께 <미암일기>에도 윤홍중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미암 유희춘은 윤홍중의 작은 아버지인 윤항의 아들 윤관중(寬中)의 장인이 되는데 이 때문인지 사위인 윤관중에 대한 기록이 <미암일기>에 자주 나올 뿐만 아니라 윤홍중에 대한 언급도 자주 눈에 띈다.

먼 바다를 향한 열망

윤홍중이 맹골도를 매입한 것은 과연 토지(재산)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바다를 향한 그의 개척정신 때문이었을까. 해남윤씨가의 인물들을 보면 여러 곳에서 간척사업을 통해 토지를 확보하려 하는 등 적극적인 해양진출의 일면들을 볼 수 있어 바다를 향한 해양개척의식이 뚜렷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해남은 서남해의 무수한 섬과 바다를 향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유난히 바다를 향한 해양기질이 강한 해남윤씨가 사람들의 의식도 가늠해 볼 수 있다. 해남윤씨가의 이러한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성향 중에 하나가 해남윤씨가의 해양 중시로 이는 실천적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정신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조선은 해금정책을 쓰는 등 바다를 멀리 하는 사회 상황이었던 것임을 놓고 볼 때 당시 서남해안 지역의 바다를 적극적으로 개척하고자 하였던 해남윤씨가의 인물들은 분명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해남윤씨가 소장의 맹골도 문서
해남윤씨가 소장의 맹골도 문서 ⓒ 정윤섭
이중 간척사업(堰田開發)은 이러한 해양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이라고 볼 수 있다. 해남윤씨가의 언전개발은 어초은 윤효정의 손자이자 윤홍중의 동생인 윤의중(尹穀中, 1524~1590)대부터 시작되어 그 연원이 매우 빠름을 알 수 있다. 해남윤씨가는 서남해안의 지역적 조건을 이용한 연해지역의 해언전(海堰田)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해전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언전에 관한 기사가 처음 나오는 것은 윤의중(尹穀中) 대다.

헌(憲, 趙憲) 이 또 "신(臣, 尹穀中)이 대탐(大貪)하여 장흥, 강진. 해남, 진도 주위로 신의 언전(堰田)이 아닌 것이 얼마나 되는가"라고 지목(指目)하였습니다. 신(臣)은 포의시(布衣時)로부터 원래 지극히 궁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선세(先世)의 구업(舊業)이 있고 또 처가의 자산(資産)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신(臣)의 형제(兄弟) 및 제종(諸從)형제, 처가(妻家)형제가 모두 가빈지인(家貧之人)으로서 함께 기한(飢寒)의 苦를 면합니다.

이곳에 나온 기록은 윤선도의 조부인 윤의중이 조헌(趙憲, 1544~1592)의 비난 상소에 대하여 반박한 상소 가운데의 일부다. 조헌의 상소는 윤의중이 크게 탐하여 장흥, 강진, 해남, 진도 등의 거의 모든 언전이 그의 소유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윤의중은 이곳에 원래 자산(資産)이 있었고 또 그것이 불의(不義)로 취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윤의중은 장흥, 강진, 해남, 진도 등 서남해안 일대에 많은 언전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윤의중의 언전소유는 그의 자녀들이 분집한 1596년의 화회문기에서도 확인된다. 이후에도 해남윤씨는 윤선도 - 윤인미 - 윤이석 - 윤두서 대등 아주 근대의 윤정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언전을 개발하여 토지를 확보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입안 및 각종 소지류 가운데 상당부분이 바로 이 해택입안(海澤立案)에 관한 문권(文券)들이다.

이를 통해 추정해 보면 윤홍중이 그 먼 섬 '맹골도'를 매입했던 것도 아마 이러한 간척지 개발의 과정에서 이루어 지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육지의 연안도 아니고 그 절해의 고도를 굳이 매입했던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바다를 아주 자유롭게 오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치 섬과 섬을 징검다리(톨게이트) 삼아 바다 위를 고속도로처럼 자유롭게 다녔던 것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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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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